나의 우주선이 비로소 착륙을 마쳤구나
드디어 이사하는 날!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겨 우버를 불렀다. 일주일간 이런저런 요구에도 쿨하게 대해줬던 스텝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호스텔 바로 옆에 있는 카페의 한국인 사장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아직 호주식 커피에 눈을 뜨지 못한 내게는 고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안정을 주는 커피 맛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만날 다음을, 지긋지긋하던 호스텔 생활에는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20분 정도 걸려 도착했을 때쯤 데이지도 그곳에 와 있었다. 나보다 먼저 시내의 한 곳으로 이사를 한 데이지가 다시 집을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하는 곳과 너무 떨어져 있어 늦은 밤 퇴근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마침 볼 집이 우리 빌리지 안에 있는 이웃의 집이었다. 서울도 좁지만, 퍼스는 더 좁더라는 사실. 데이지가 집을 보러 온 김에 켈리와 다 같이 점심을 하기로 했다. 데이지는 이웃집을 둘러보러 가고, 나는 켈리의 도움을 받아 내 방에 짐들을 들여놓았다. 드디어 내 방이다. 내 방이라니! 바닥을 치던 안락함의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장도 볼 겸, 식사도 할 겸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쇼핑센터로 향했다.
처음 장을 본다는 사실에 설레었지만 "뭐 살 거야, 지니?"라는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내 1인분의 삶을 위해 장을 본 적이 언제던가. 까마득한 신촌 연세로에서의 6개월 자취 경험. 그때는 일하느라 바빠 장을 본 적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냉장고를 채워 넣기가 무섭게 세상을 하직해버린 야채와 반찬들과 안녕하기 일쑤였다. 소분 야채들은 비싸고 양도 적은데 누구를 위한 걸까 한 적이 있었건만 결국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역시 해봐야 아는 게 천지다.
아무 생각 없이 사서 버리느니 우선 먹을 물과 아침에 먹을거리부터 사야겠다고 카트에 담은 건 식빵과 달걀이었다. 호주 마트에는 달걀의 종류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닭장에 가둬놓고 기르는 닭이 낳는 'Caged eggs', 닭장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닭이 낳는 'Cage-free eggs' 그리고 밖에 풀어놓고 기르는 닭이 낳는 'Free-range eggs'. 새로운 풍경이었다. 엄마와 장을 볼 때는 왕란이냐, 특란이냐, 유정란이냐를 놓고 골랐었는데, 여기는 닭이 길러지는 환경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니. 동물 복지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동물권에 관심이 더 많아진 요즘에는 동물복지 식품 또한 여러 논란의 중심이라는 것도 알지만, 달걀의 크기와 질만을 놓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역시 새로운 곳에 놓이면 생각이 새로워질 기회도 많이 얻는다.
집에 돌아와 오래 묵은 먼지와 고양이 털들을 빨아들이고, 뽀송한 침대 시트를 깔았다. 캐리어에 꽉 차 있던 짐들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자주 쓰는 화장품, 노트와 충전기 같은 것들은 침대 옆 협탁에 꺼내놓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옷장 안 수납함에 옷들을 착착 개어 올렸다. 정리를 마치고 나만의 욕실에서 첫 샤워를 하고 나와 느끼는 개운함은 왠지 특별했다. 드디어 친구들이 선물해준 뽀송한 실내화를 꺼내 신고, 기분 좋은 꿈으로 인도해 줄 드림캐쳐도 꺼내 걸었다. 선물 받은 소중한 순간들의 사진도 몇 장 골라 머리맡에 붙였다. 곁에 없지만 마음속에선 언제나 함께인 사람들을 보며 더 씩씩해지겠다고 다짐하는 밤이었다. 언젠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친구의 연약해진 마음을 어루만져줄 물건을 건네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비로소 나는 내 방에 있었다. 옷걸이, 빨래를 담을 바구니, 드라이기 등 필요한 것 투성이었지만 동시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 몸 하나 편안히 뉘일 수 있는, 불을 켜고 끄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엄마와의 영상통화도 눈치 보지 않고 맘껏 할 수 있는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그날 저녁 켈리는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이사 온 첫날만큼은 본인이 요리해 대접하고 싶었다며. 가만히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 옆에서 거들며 우리의 죽이 얼마나 잘 맞는지 확인하던, 웃음 멈출 틈 없던 요리 타임. 사실은 처음 해보는 요리라며 내가 첫 입을 맛보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그녀. 그녀는 내가 집에 적응하는 동안 쉬는 날마다 바다로, 강으로, 숲으로 데려가 주었고 우리는 그곳들을 따라 유유히 걸었다. 퍼스의 자연을 듬뿍 느끼며 걸으니 비로소 눈이 뜨이고, 숨을 트이는 듯했다. 나의 우주선이 비로소 착륙을 마쳤구나. 낯선 외계의 공간에 발을 디딜 일만 남아 있었다. 그 낯선 세계의 다른 외계인들처럼 먹고살 궁리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