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가. 예전부터 나는 건넌다는 개념을 좋아했다. 그래서 ‘님하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그 시는 나에게 충격적으로 아름답고 구슬프게 다가왔었다. 섭(涉)이라는 한자도 좋아한다. 파자했을 때의 느낌도 좋아하고 그 모양도, 발음도 모두 좋다.
시커먼 심연 같은 도로를 생선뼈처럼, 혹은 하얀 피아노 건반처럼 가로지르는 흰 줄무늬. 어릴 땐 하얀색만 밟지 않으면 죽는다고 상상하면서 펄쩍펄쩍 뛰어 건너기도 했다. 혹은 차에 치였을 경우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지에 서고자 꼭 횡단보도로 건너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건너든 간에 중요한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전한 방식이든 괴랄한 방식이든.
건넌다는 것은 또한 의지를 전제한다. 그러니까 내가 30대인데 40대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는 데 있어서 나의 의지가 개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횡단 하면 마치 남극 횡단 혹은 마젤란의 일주와 같이 강렬한 의지로 가로지른단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는 지금 가만히 서있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분명 이쪽에 서있다. 저쪽으로 가고 싶은지도 분명치 않으며 저쪽이란 대체 어디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만일 눈 앞에 안개가 걷히듯 하얀 건반들이 떠오른다면 넌 스타카토로 연주하듯 통통 튀어 건널 생각이 있어? 아니면 만일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넌 하얀색 페인트통을 가져올 생각이 있어? 그렇지만 내가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장차 타인 또한 이곳으로 건너야 한다는 표지를 굳이 새길 필요가 있을까? 나한테는 이 모든 것이 횡단보도의 직선이 아닌 구부러진 물음표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순간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지점과, 저 지점, 그리고 그것을 잇는 횡단보도를 상상하면서. 또 교통량과 통행량, 도로의 폭과 신호등의 필요성과 거리의 길이와 그 모든 것을 계산하여 적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지점에 서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