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매력과 야속함, 양가적인 감정들을 겪으면서 나만의 커리어 로드맵을 그려온지 만 5년이 되던 때에,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쌓여가는 연차'가 요구하는 그림의 내용과 방향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문화 속에서, 마냥 열심히 달리는 실무자 관점에서의 이상형을 고도화하는 데에만 집중했던 나였다. 뛰어난 오너십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재밌게 일하면서 큰 임팩트를 만들 수 있는 조직, 그곳에 속하기 위해 내가 갖춰야 할 역량은 여러 실무적 경험치를 통해 쌓을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험치를 쌓으며 '연차'도 함께 쌓여 갔고,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정도의 리더십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때가 도래했다. 또한 나 개인의 커리어에 대한 방향성과 별개로, 조직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인풋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논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전략까지도 고민을 해야만 했다. 이는 내가 처음 스타트업에 발을 디딜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나는 실무 경험을 더 쌓으며 소위 말하는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이러한 요구사항들이 퍽 당혹스러웠다. 마냥 즐겁게 열심히 뛰기만 하는게 능사인 줄 알았는데, 어디로 어떻게 함께 뛸지 결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니...
2020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내가 매니징하는 팀원이 늘어갔고, 명시적으로 "실무보다는 매니징 쪽에 무게의 추를 둬라"라는 지령을 받게 된다. 어느새 직무도 사업개발 직무에서 PO (Product Owner)로 전환되었고, 제품 전반에 대한 플래닝과 총 8명의 팀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분기 단위로 진행하는 ORK 플래닝, 2주 단위로 돌리고 있던 스프린트, 매주 진행하는 1:1 미팅들 - 크게 달라진게 없어 보이지만 점차 내가 리더에게 받는 피드백이나 가이드는 줄어들고, 내가 팀원들에게 줘야 하는 피드백이나 가이드는 늘어갔다. 운영하고 있던 여러 프로덕트 라인업들을 계속해서 운영할 것인지, 운영한다면 함께 제공될 서비스의 스콥이 각 프로덕트별로 어느 정도 되어얄지 의사결정을 해야 했다. 필요할 경우 채용에 대한 의사결정도 해야 했으며, 제공되던 서비스 중단에 대한 의사결정도 해야 했다. 이에 더해, 서비스 하고 있던 여러 국가들에 대해서도 각 국가별 매출 성장 가능성을 짚어보고 어느 국가를 더 크게 투자해야 될지도 판단을 해야 했다. "아니, 내가 이런 의사결정을 해도 되는건가?" 매일매일이 부담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버즈빌이 특히나 분업화가 잘된 조직이었기에 위임되는 책임과 권한의 크기가 컸을 수도 있겠다. 허나 이러한 생각을 해본적 없는 나로서는, '쌓여가는 연차가 요구함직한 역량'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 나는 리더십 커리어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실무 경험을 쌓아갈 것인가? 계속해서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이, 스타트업에서 가능한 것인가? 서른 한살 나이에 리더십 커리어에 접어드는 것은 너무 이른건 아닐까?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늘상 있어 왔지만 6년차에 찾아온 고민의 크기는 제법 컸다. 나의 이런 고민과 별개로 하루하루 더해지는 책임과 권한, 그리고 그것이 주는 심적 부담은 커져만 갔다.
'회사'라는 것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만, 주 7일 중에 5일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사실 어마어마하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정체성에도 변화가 생기고, 인생의 가치관도 크게 변한다. 나 또한 그저 취업 준비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스타트업 커리어였는데, 어느새 그것이 곧 인생 전반의 고민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일하는 '재미'를 추구하였더니 동시에 삶이 '재미'있어졌고, 업무적인 '성장'을 추구했더니 삶 자체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직장 내에서의 '자율', '책임감', '협업'을 중시했더니 덩달아 내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 자체도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함께 변화했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결국, '앞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인생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고민이었다. 갑작스레 커져버린 책임과 권한으로 인해 다시 찾아온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힘들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선택'이 내 삶에 끼칠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고민의 걸음 한걸음 한걸음이 쉽지 않은 것이다.
결국 긴 고민 끝에 나는 이직을 선택했다. '아아, 나는 5년 뒤에 무얼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걸 위해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곳에 남아 리더십 커리어를 걸으며 IPO 상장 경험을 쌓는 것은 당장 1년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인 것 같은데, 향후 5년을 바라볼 때에도 값진 선택일까?' 5년 뒤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쯤 내가 했으면 하는 것은 분명 나만의 앱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당장은 필수적인 실무 경험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실무 경험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를 찾아 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유저들이 사용하는 웹/앱 서비스의 크고 작은 신규 기능들을 기획하는 직무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서버와 클라이언트 소통 구조까지 고민하는 직무
창업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조직
그리고 그 외의 개인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여러 조건들
그렇게 새로운 스타트업, 피플펀드에 입사한지도 꼬박 2주가 지났고, 새로운 감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곳도 역시나 맨땅에 헤딩해야 하기도 하고, '갑'의 횡포에 맨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기도 하며, 팀간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하며 빈 공간들을 메워가야 하기도 한다. 업종 자체를 애드테크업에서 핀테크업으로 옮긴 나로서는 아무런 도메인 지식 없이 더욱 고군분투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알게 모르게 애드테크의 '익숙함'에 녹아들어 몸과 머리가 제법 오랜 기간 덜 분주했던 걸까, 이직 이후 부쩍 바빠진 몸과 머리가 퍽 어색하면서도 신선하다. 다시 스타트업 초년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곳에서도 곧 대스밸리가 찾아오고 또다른 스케일업을 맞이하게 될텐데, 벌써부터 설레고 벅차다.
지난 6년 사이에 스타트업의 스팩트럼은 크게 넓어졌다. 이미 대기업처럼 성장해버린 스타트업들도 많고, 초기 스타트업임에도 연차 10년차 이상의 시니어들 위주로 구성된 스타트업들도 많다. 서비스 측면에서도 '게임', '커머스' 외에도 이제는 '라이프스타일', '교육', '금융' 등 전반적인 영역으로 스타트업들이 뻗어 있다. 이제 동일한 스타트업 업계 내에서도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선택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타트업의 이러한 다이나믹함은 하루하루 나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다음에 나는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선택을 또 하게 될까. 1년 뒤는 커녕 3개월 뒤도 예측하기 어려운 스타트업, 10년 넘게 몸담은 거 같지만 고작 6년 밖에 안된 스타트업, 어쩌면 나의 스타트업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