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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원 Sep 22. 2021

오늘도 절레절레와 맞서는 이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버락 오바마 자서전 <약속의 땅>

미국 대통령이라니.


우리가 삶의 터에서 아무리 많은 이해관계자들과 싸우고 있더라도, 미국 대통령만큼 많고 지랄 맞고 복잡할까. 절대 아닐 거다. 적어도 어디에서나 나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전세계의 테러리스트들과, 내 앞에서는 이를 드러내며 웃으면서도 뒤에서는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협잡질을 하는 전국의 수많은 국회의원들은 없을 것 아닌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오바마 케어를 통과시키고, 넵튠의 창 작전으로 빈 라덴을 사살하고, 4성 장군들과 파병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회담 중 숨어 있던 중국 후진타오 총리의 호텔 방을 급습해서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는 스릴감까지. 잘해도 지랄, 못해도 지랄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어떤 고민으로, 어떻게 그 많은 고뇌들을 이겨냈는지 정말 세세하게 적혀 있는 일기장이다.

Thinking Barack

얼마나 할 말이 많으셨는지, 920쪽짜리가 제 1권이다.


첫 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부터 2008년에 당선되어 첫번째 재임기간까지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만큼 지독할만큼 세세하고,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는, 원칙과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흥미로웠다.


최근 큰 결정을 앞두고 내 일기장에 가장 많이 쓰여 있었던 키워드는 바로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처절한 간절함으로 920쪽에 달하는 벽돌과 같은 책을 주문했다(내가 책을 추천해준 사람이 왜 무기를 집에 보냈냐고..).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두려움과 싸우는 그의 감정들이 너무나도 솔직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통에 담겨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기분'으로 매일 산다는 그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직접적인 코칭을 받을 수 있다니, 책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내 방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주제로 코칭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책을 펴들었다.


버락, 당신은 여호수아 세대요

책 전체가 정말 이것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을 정도의 세세함으로 아래의 에피소드들이 쏟아진다.

힐러리를 어떻게 설득시켜 자신의 행정부에 참여하게 했는지

2008년 경제 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상하원의 재정정책 줄다리기

오바마 케어 통과를 위한 지난한 설득의 과정

빈라덴 사살 작전의 시작과 의사결정, 그리고 끝

200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배경

원자바오를 비롯한 BRICs 지도자들이 숨어있는 비밀의 호텔방에 쳐들어가 협상을 타결시킨 이야기

반기문에 대한 개인적인 평 (너무 솔직하다..) 등등등...


그의 열정, 팀플레이어, 리더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세한 기록들이 정말 많아서 도대체 백악관 안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졌었는지, 미국 대통령 정도 하는 사람은 어떤 사고로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꼭 모두 읽어보기 바란다.


단 하루만이라도 이정도의 복잡함과 협잡함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꿈꿔 볼 만하지만, 버락은 가족들과 행복한 휴가를 보내는 것을 상상하면서도, 그 무게를 이상하리만큼 담담하게 이겨낸다.

"대통령님은 어떻게 견디고 있어요?"

나는 계단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회의에 필요한 메모를 찾으려고 재킷 호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그녀가 환자의 증상을 들여다보는 의사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뜯어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나는 찾던 것을 찾아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요, 정말이에요. 왜요? 내가 달라진 것 같아요?"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과 똑같아 보여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3년 정도 되었을 때 비서실장과 버락이 나눈 이야기다.


그가 어떻게 그 무게감을 이겨냈는가, 어떻게 그 두려움을 이겨냈는지 그 원동력의 원류를 찾아가 올라가보면, 민주당 선거를 앞두고 그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그에게 한 말이 아니었을까.


버락, 당신은 여호수아 세대요.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이 여정의 다음 구간을 책임져야 해요.

"나의 첫 영감의 원천과 친밀하게 이어진 사람이 내가 하려는 일이 가치 있으며, 허영심이나 야심의 발로가 아니라 끊이지 않는 진보의 사슬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게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2008년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그러나 그만큼 혼란스러운 나라의 왕관을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내가 왜 지금의 안락함을 벗어나 이 나라의 수장이 되어야 하는지, 가족들과, 캠페인 사람들과, 그리고 국민들을 차분하게 설득하는 그의 진지함과 책임감, 그리고 노련함, 그 싸움의 전 과정이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가 속한 공동체와 그가 믿는 가치, 그가 믿는 신념에 대한 책임감이 그 커다란 두려움을 이겨내게 했던 것이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로펌을 가서 유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엘리트였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뿌리와 운명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굳이 벌여서' 미국이라는 머리 아픈 나라의 수장이 되기를 선택한 그를 보며, 상대적으로 작은 일상의 불편함과 복잡함에 머리를 곯고 있는 나의 삶을 겸손하게 돌아보게 만들었다.


전쟁과 같은 선거 활동에 이리 치이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실제 전쟁과 경제정책을 지휘하게 되면서 끊임없는 악몽과 비난에 시달렸지만, 결국 그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갔던, 역사상 가장 열린 행정부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킨 그를 보며 숙연해졌다.


'나는 겨우 이 정도 힘듦으로 힘듦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있을까'


오바마 시절 가장 유명했던 사진 중 하나가 아닐까. 백악관 복도의 청소부와 fist bump를 하는 오바마.



오늘도 절레 절레와 맞서는 이 땅의 ENFJ들에게

사실, 정치와 전쟁, 외교가 수두룩 빽빽하게 적혀 있는 920쪽에 달하는 성경책과 같은 이 책을 무엇보다 즐기며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바마가 ENFJ여서다. MBTI 신봉자로서, 그리고 나도 전세계에 3%밖에 없다는 희귀한 ENFJ 중 한명으로서, 오바마가 ENFJ라는 것은 아주 충격적이게 기분이 째지는 일이다.

언변능숙형, 지독한 진지충, 인간 댕댕이로도 불린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은 나의 행동을 그가 똑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묘하다. 오바마가 ENFJ임을 안 것은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의 에피소드에서이다.


둘이 연애할 때,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서 오바마가 갑자기 고뇌에 찬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니,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이 중요한 순에 갑자기 인상을 팍 쓰다니, 여자친구는 오해하기 십상이지. 미쉘은 별로였나, 내가 좋은 애인이 아닌가 걱정이 막 되었는데, 결국 그 활달한 성격에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버락, 무슨 생각해?"

버락이 은근히 쳐다보더니 딱 두 마디를 내뱉는다.

"소득 불평등(Income inequality)."


미치고 팔짝 뛰는 절레 절레 모멘트! 아니 왜 그 상황에 소득 불평등을 걱정해, 이 진지충아!

평생 느껴온 답답함을 이르려고 씩씩거리며 써내려간 미쉘이 상상되어 너무 웃겼다.

(2019년 최혜원의 최고의 책이므로 추천한다. 심지어 미셸의 책은 568쪽밖에 안된다! 글은 미셸이 좀더 잘 쓰는 듯하다. 멋진 언니.. >> 클릭 :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 )


오, 주여...


ENFJ는 고뇌를 좋아한다. 그리고 일을 혼자 해결하고 싶어한다. 혼자만의 굴에 들어간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 활발할 때는 잔디밭에 풀어놓은 골든 리트리버마냥 정신 없이 뛰어 다니고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리다가, 걱정이 되고 결정할 것들이 있으면 혼자만의 굴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카톡 프로필 사진도 없어진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이럴 때마다 "괜찮니..?"하고 연락을 주는 것이 ritual이 되고 말았다(그리고 은근히 이런 것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방에서 문을 닫고, 혹은 혼자 아무도 모르는 카페 구석에 앉아 혼자 생각하면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없을지 깊은 심연에 내려가 슬퍼한다. 오바마의 표현대로 '며칠간 우울하게 상처를 핥는다'. 오바마가 20대에 한창 흡연자였을 때 방안에 뿌연 담배연기를 꽉꽉 채우면서 혼자 생각하는 모습과 겹쳤다. 그리고 가만히 두면 자기가 자기 동굴을 벗어나 다시 나타난다.



미안한데, 아무도 너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단다 

이런 ENFJ들에게는 꼭 옆에 직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버락 옆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미셸, 그리고 그 장모님이 있었다.


장모님과 대화할 때마다 명심하게 되는 사실은 어떤 골칫거리와 씨름하든 아무도 내게 대통령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니 그저 받아들이고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매번 하는 말이다. 아무도 너에게 1등을 하라고 한 적이 없었어, 아무도 너에게 고생하는 스타트업에 가라고 하지 않았어, 아무도 너에게 사업을 하라고 하지 않았어. 네가 선택한 길이고, 네가 감당하렴. 대신 엄마는 맛있는 밥은 차려 줄 수 있어.

Michelle's mom : "Mm-hmm, Barack, I didn't force you to do so. "

나는 이런 내가 아주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유상종이 맞는 게, 전세계에 3%밖에 없다는 희귀한 이 ENFJ들이 내 주변에는 10명이 넘는다. 적어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만 사서 고생하는 건 아니구나. 그리고 오바마 같이 세계 역사에 큰 스크래치를 남긴 사람도, 주변 사람들이 다들 절레절레 하는구나, 그러려니 팔자려니 하고 웃어 넘기는구나 생각하면 웃음이 피식 나온다. 그리고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오바마를 한명의 정치인이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오늘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절레 절레와 맞서는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두려움을 목전에 둔 사람들을 위한 위안서다.


하물며 내가 미국 대통령도 아니고, 이정도는 용기 내어 보자고.


자, 이 책을 읽고 싶어졌는가? 어서 주문하세요. (광고 아님. 내돈 내산.)

>> 클릭 : 버락 오바마의 <약속의 땅>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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