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의 책 이야기

아리요시 사와코'황홀한 사람'(청미출판사)

"단지 늙는 것뿐이라면 괜찮다. 늙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니까. 초록이 무성하고 꽃이 피는 시기가 있다. 노부토시 자신에게는 사토시를 낳아 기르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까지 이른 것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시들고 썩는다. 시드는 것도 괜찮다. 고담枯淡의 경지라면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썩는 것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도 자연이니 감수하겠다. 그러나 병든 잎이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또는 빨갛게 농익은 감이 사람 손에 닿지 않는 것처럼, 또는 빨갛게 농익은 감이 사람 손에 닿지 않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져가는 것처럼, 시들지도 못하고 썩지도 못한 추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본문 중에서-


오랜만에 읽었던 소설 아리요시 사와코의 황홀한 사람. 앞부분만 읽다가 죽음과의 거리감 때문에 덮어버렸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잔잔하게 읽기 시작해 책을 덮을 때쯤 가슴을 때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게 하는 소설이다. 한 편의 문학 드라마를 보듯 고요하고 감동도 있고, 잔잔한 웃음도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다.


읽는 내내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 내 옆에 누워 주무시는 엄마에 대한 측은함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뒤섞여 시게조의 삶이 그저 이야기 속 인물에만 그치지 않았다.


시게조를 통해 나의 엄마를 생각하고 나의 노년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아프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공허함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내용이다.


​ 책장을 덮고서 잠깐 동안 멍해있던 순간 가슴이 너무도 아팠고 그러고는 목놓아 울었다.


삶은 감사함이고,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느껴도 죽음의 순간만큼은 받아들이기가 쉬운 순간은 아닌 듯하다. 특히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프고 기쁨이 되기 어렵듯이 온전히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본인이 인지한 죽음이라면 좀 더 나을까? 시게조처럼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의 삶이라면 어떠할까?


근래에 비슷한 내용의 연극을 봤었고,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된 안락사 또는 조력 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더욱더 가슴과 뇌리에 박여서 되뇌어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비참한 죽음은 원하지 않을 것이고, 곱게 살다 고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곱씹어 본다. 나의 어머니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삶과 죽음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시간 차이다. 앞선 것이 삶이고 나중의 것이 죽음. 삶의 시작이 선택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듯 죽음 또한 선택이 아닌 주어진 것이라고만 인지해오던 것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몇 년을 이어가는 삶이 과연 삶일까? 이제는 그리고 앞으로는 죽음이 선택이 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여겨지는 죽음이 아닌, 고통과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죽음. 가톨릭 신자인 나는 죽음의 권한이 신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감사함이었고,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이 꼭 죄일까? 의문이 든다.


내가 바라는 바는 나의 어머니가 조용히 가족들과 행복한 저녁을 보내시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면 좋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력 사라는 것을 떠올려본다.


​ 봄날 끝자락이면 집 근처 종합병원 담벼락에 화려하게 피어난 왕벚꽃나무가 바람에 휘날려 꽃분홍과 하얀 꽃비를 내리듯 그런 조용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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