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성'빛이 이끄는 곳으로'(북로망스)
"계단에 앉아 한참 동안 내려올 수 없었다. 그동안 내 믿음대로 작업해 왔던 건축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의 직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프랑스와에게 건축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었고 그녀의 기억을 지켜주는 안식처였다. 프랑스와는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연의 모습으로 아나톨을 위로하는 진정 아름다운 건축가였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최고다. 나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모든 글을 쓰는 분들의 노고가 존경스럽지만, 있지 않은 사실을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만들어 내는 일. 그들의 창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인 작가가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통해 만들어 낸 이야기는 흥미를 더하고 감동을 주며, 결말로 갈수록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유럽은 100여 년 넘는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유지되어 10년이든, 30년이든 재방문을 했을 때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나 또한 늘 찾는 장소들이 있다. 아쉬운 점은 한자리에 있는 건축물들이 옛 건물 그대로 고스란히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천에 있는 화계사라는 절을 종종 찾았었다. 가을 녘 흙길 위로 낙엽들이 덮인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새소리를 들으며 둘러보았던 오래된 절 한 채. 그곳에서 만나 볼 수 있었던 짧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솟아오른 노스님. 그분을 뵈러 그 풍경을 잊지 못해 찾곤 했던 그곳은 어느 해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 길이 깔리고, 스님은 돌아가시고, 낡디 낡았던 건물 한 채는 현대식 화려한 빛깔의 사찰로 바뀌었다. 위로와 안식이 되어주었던 그곳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고 오로지 헤어진 연인과 함께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아 잊혀 가고 있다.
이야기는 뤼미에르 클레제가 파리 시내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모여 있는 시테섬에 위치한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박물관, 오르세 미술관이 있고, 센 강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백 년이 넘어 보이는 낡은 집을 거래하며 시작된다.
이 집을 거래하기 위해 찾게 된 스위스 루체른에 위치한 왈쳐요양병원을 방문하면서 만나게 된 소유주 피터 왈쳐. 그를 통해 알게 된 집과 요양병원이라는 두 건축물에 얽힌 사건들과 인물들.
그곳에 대한 사연이 얽힌 문제를 풀어나가며 집의 비밀과 피터의 비밀을 파헤쳐 간다. 건축물이 건축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 깃들고,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되어 우리에게 건축이 갖는 의미를 전달한다.
'4월 15일의 비밀' 요양원은 세월이 흘러 잊혀 갈 것이다. 피터 왈쳐에게는 그래도 뤼미에르 클레제 덕분에 프랑스와 왈쳐와 아나톨 가르니아의 존재가 상기되어 영원히 파리 저택과 함께 잊히지 않고 사랑과 추억이 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프랑스와는 건축가답게 예리하다.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허술하거나 단조롭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피터에게 이어져 기억될 것이다.
이 소설을 영화로 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영화가 아닌 외국 영화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연상되는 풍경으로 멋진 배경과 함께 배우들의 멋진 연기, 프랑스와 왈쳐의 애처롭고 헌신적인 사랑,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멋진 영화 한 편이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상상을 하게 된다. 건물과 어울리는 빛과 함께...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도 믿지 않는다. 우스운 감정놀음이고, 시간이 가면 잊히고, 영원한 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게 사랑이라 생각하고 살아간다. 프랑스와 왈쳐 같은 사람만 있다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한다는 것에 후회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그런 멋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것에 기대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사랑을 꿈꿔본다. 현실에서도 프랑스와 왈쳐 같은 사람은 만나보기를 또한 그런 내가 되기를 꿈꾸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