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끝자락에서
환경이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짐에 따라 좋아하던 계절도, 싫어하던 계절도 바뀌어 간다. 20대의 나는 여름이 좋은지 싫은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았다. 삶은 늘 치열했고, 주어진 하루와 관계, 일터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순간도 삶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원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닦달하듯 살아왔고, 스스로에게 자비롭지 못했다. 언제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내 마음을 쉬게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이 내 여름을 바꿔놓았다.
남자친구와 함께한 그 시절의 여름은 새삼 모든 것을 다르게 보이게 했다. 바다도, 산도, 햇빛과 바람도 그의 곁에 있을 때는 그 어떤 풍경보다도 황홀하게 빛났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던 저녁, 불빛이 잔잔히 번지는 해변의 풍경, 짭조름한 바람결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계절이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방식’을 알았다. 그 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모든 여름이 그러하듯, 그 끝은 찾아왔다.
여름의 끝자락, 함께했던 마지막 여행은 짧은 2박 3일이었지만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루의 끝마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그다음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으로 흔들렸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알았던 것 같다. 그 여정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임을, 그리고 사그라드는 관계가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음을. 바닷바람에 기대앉아 그저 바다만 바라보던 밤, 행복과 두려움,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가슴 깊이 새겨졌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여름날의 기억으로.
그 여름은 내 안에 ‘한 시절의 빛’으로 남았다. 그 계절이 남긴 감정의 색들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깊은 곳을 물들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 달라졌다. 요즘의 여름은 그저 여름일 뿐이다. 덥다고 짜증 내지도, 햇살에 설레지도 않는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담담한 여름.
그런데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처럼 마음이 벅차오르던 여름을 다시 맞이하고 싶은 건 왜일까. 아마 그 시절의 나는 미련 없이 사랑했고, 뜨겁게 몰입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좀 더 단단해졌지만, 동시에 감정의 결이 조심스러워졌다. 더는 큰 행복에 들뜨지도, 깊은 슬픔에 휘청이지도 않는다. 대신 마음속 어딘가에 단단한 평온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여름밤의 향기가 스며들 듯, 그 시절의 여름이 내 안을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새벽녘 세방 낙조의 바다, 붉게 번지던 동틀 무렵의 기억이 떠오른다. 두 눈 가득 바다를 담으며 세상이 다시 시작되는 그 찰나, 나는 내 인생을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제 그 기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매년 여름의 끝자락이면 조용히 내 마음을 두드린다. 시간이 흘러도, 그 여름은 여전히 내 안에서 빛나고 있다. 한여름 낮의 윤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