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22분 마라톤 출발선에 섰습니다. 하프마라톤 참가자, 10km 55분 이전 기록 보유자들이 앞서 출발하고 그다음으로 출발선에 섰습니다. 빽빽하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앞으로 쭉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얼떨결에 출발하며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멈추지만 말자'
미끄러운 길, 질퍽한 길, 물웅덩이 그러다 잠깐 이어지는괜찮은 길을 번갈아 달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앞서 갔고, 어느 구간부터는 제가 걷는 사람들을 앞서기도 하며 느리지만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힘들어지면 속도를 더 늦추고, 길이 트일 때는 속도를 조금 내보기도 하면서 가다 보니 5km 반환점에 도착했습니다.
3km 부근부터 불편한 신호를 보내던 오른쪽 발목이 반환점을 돌 때즈음엔 아무렇지 않아 지고, 대신 오른 무릎 위쪽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구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7km쯤 갔을까요? 왼쪽 무릎이 괜찮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뛰면서 왼쪽 무릎이 불편했던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계속 달리면서 왼쪽 다리 감각에 집중했습니다. 딛는 방법을 달리해보기도 하고, 최대한 두 발에 하중을 고르게 분산시키려 노력했습니다.다행히 통증은 잦아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멈추지 않기 위해 풍경도 보고 일부러 딴생각도 하면서 버텼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멈추지 않고 완주하기 성공!
뛸 때는 몰랐는데,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가장 밖에 입은 경량 패딩 조끼 뒷면까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열이 올라 시뻘게진 얼굴을 식힐 틈도 없이 탈의실을 찾아 젖은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서 길을 나섰습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길을 재촉하면서도 얼떨떨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은 아직 오전 10시 40분이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겨를 없이 바로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타고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눈보라를 뚫고 10km 마라톤을 뛰고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사무실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오후 6시까지 근무를 했습니다.
하루종일 얼떨떨, 멀티버스 세상에서 각기 다른 시공간을 살았나 싶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하루였습니다.어제 하루가 신기할 따름입니다. 25000보를 걸었다는 기록도 그러하고요. 자주 잊고 살지만 신체의 잠재력은 참 무궁합니다.
예고 없이 힘을 몰아서 썼으니 몸에 보은 하는 마음으로 며칠 잘 먹고 잘 자면서 회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