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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Sep 05. 2017

이번 여름


바람이 선선하다. 이번 여름을 돌아본다. 


여름의 많은 면을 사랑한다. 특히 더위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느슨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속살과 함께 드러낼 수 있는 본능도 좋다. 더 많이 밖으로 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좋다. 적극적으로 허물어지기 위해 완벽한 피서지를 찾는 것도 좋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까 알겠다. 내 경우에는 더위로 행인의 옷을 벗게 만들어서 바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는 어느 동화처럼, 바로 태양의 그 부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위가 사람들을 벗게 만드는 것이 좋고, 나 스스로 벗는 것이 좋다. 여러 의미에서.


이번 여름에 나를 마음껏 풀어놓고 마음껏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공허해진 이유가 뭘까. 나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노느라 말라버린 통장처럼 모두 비어버렸다. 방탕한 한 여름밤의 파티를 마치고 일어났는데, 더럽고 작고 초라한 집에 나 혼자 남은 기분이다. 모든 걸 잃은 후다. 


지독한 여름을 겪었다.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 돈 때문에 일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졌다. 천박한 것을 함부로 경멸할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무기력해지고, 회의는 짙어졌다. 행복한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아무도 나를 떠나갈 수 없게 젖은 싸구려 전단지처럼 들러붙고 싶다. 내가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 자꾸 나를 실망시키는 나. 


내가 사랑했던 여름, 수명을 다 하고 말라죽은 벌레의 뒤집어진 배처럼 허옇게 바래버린 여름.

이 여름이 자꾸 떠오를 텐데, 앞으로도 여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시간이 대답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끔찍한 여름조차 그리워지게 될 거라고. 언젠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름도 있을 거다.

내가 이 지경인 것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위안삼아 본다. 여름이 어느새 왔다가 어느새 가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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