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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락 Jan 14. 2024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교무실로 불러

문제집을 선물로 주셨다

펼쳐본 문제집 사이에는

아마도 선생님 책상 위 탁상달력에서 뜯긴 종이가 끼워져 있었고

검은 볼펜으로 적힌 글씨가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게

때로는 행운일 수 있어



한참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시험을 못 봤거나 상을 타지 못했다는 등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일이 없었을 때였는데

그 말을 반드시 전해줘야겠다는 듯 마땅한 종이도 아닌

달력 한 장을 뜯어 왜 전해주신 걸까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나의 상황을 변화시길 수 있는 결정을 내리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

저 문장을 여태 곱씹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아실까 모르겠다


저 문장 하나로 인해

초중고를 합쳐 어떤 선생님보다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계시다는 것도


대부분 의도한 바 없이 하지만 충실히 흘러가는 세상의 사건들을 보며

저 말만큼 옳은 말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주말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다가

또 저 말을 떠올린다


"그 박테리아는 어쩌면 당신이 숨 쉬는 데 필요한 산소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그 단단한 가장자리에서 마지못해 뛰어내리게 했던 실연은 결국 더 좋은 짝을 찾게 해 준 선물로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꿈들까지도 검토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희망까지도.. 어느 정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나는 커리어가 없어요. 나에게는 삶이 있을 뿐이에요"

커리어의 정점 인터뷰에서의 무심한 틸다 스윈튼의 저 말을 소름 끼치도록 멋있다고 생각했고

목적지로 향하는 최단거리가 아니라

최대한 그 길에 핀 꽃들과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아름다운 것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길로 돌아서라도 가겠다고 다짐했었으나


커리어의 목표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목표 없는 삶을 사는 시시한 녀석'의 취급 속에서

삶의 에너지가 귀한 줄 모르고 낭비하며 비효율적으로 달리고 있나 고민이 되어

나에게는 삶이 있을 뿐이나 커리어가 먼저 있어야할 것 같다고 자주 흔들렸다


여전히 언제나 달콤하고 포근한 문학과 영화를 한동안 멀리하고

당장 일에 도움이 되는 책들만 가까이했다

명확한 커리어 패스를 그리기 위해 성과, 프로젝트, 비전에 집중했다


그것은 분명히 직업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고

직장 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커리어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약간의 안도를 하며 주말에 읽어본

오래간만에 업무와 관련이 없는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잔잔하게 메말라가고 있던 마음에 축축한 동요를 금새 일으켰다


명확한 비전을 갖기 위해 선은 많이 그을수록 좋았다

도움이 되는 것과 불필요한 것,

명확한 것과 애매한 것,  

효율적인 것과 쓸데없는 것,

돈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많은 선들을 분명 말과 행동에 흔들림이 없게 해 주었지만

무엇인지 당장은 모르나 잔잔히 나를 붙잡던 것들이 떠올랐다


바쁜 도중에 들어온 힘들다는 후배의 티타임 요청

먹고싶지 않다는 말에도 아침에 남편이 졸린 눈 비비며 깎아준 사과

매번 대답해 줘도 까먹지만 물어봐주는 직장동료의 '주말에 뭐 했어요' 질문

직접 고치면 훨씬 빠르나 5~6배의 시간을 들여 설명해 주는 코멘트

그날따라 유난히 맛있었던 똑같은 가격의 라테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면 하지 않는 편이 이득인 말과 행동들이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들을 또 잊는다


가장 빠르게 멍청한 짓 하지 않고 달려가야 한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딛고 있는 땅이 무엇인지 바라보지도 않고 일단 박차게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들을

좀 더 무방비하게 받아들여보겠다고

바보처럼 예전에 했던 다짐을 다시 한다


분명 삶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하다 보면 또 까먹겠지만

깨닫고 까먹고 깨닫고 까먹다가

어느 날부터는 까먹었던 뭔가가 있었던 거 같다는 정도로 영원히 기억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 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 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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