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우리는 흔히 관광을 이야기할 때 경제 논리, 산업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하지만 관광은 단순한 산업이나 경제 활동이 아니다. 관광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자, 문화가 교류하는 장이며, 지역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본다.
"관광은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관광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치 지향과 쟁점들을 품고 있다. 기후위기, 인권, 지역사회, 전통 보존과 같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테마들과 관광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관광을 둘러싼 가치관과 정책 방향을 '진보'와 '보수'라는 렌즈를 통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사람 중심 관광'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은 누구를 의미할까? 단지 관광객만을 뜻하는 것일까? 진정한 '사람 중심 관광'은 관광객의 편의와 만족을 넘어 지역 주민, 관광 노동자, 그리고 지역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관광지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의 노동환경은 어떠한지, 지역 주민들이 관광 개발로부터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 과도한 관광객 유입으로 주민들의 일상이 침해받지는 않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바로 사람 중심 관광의 핵심이다.
최근 문제가 직면되고 있는 오버투어리즘 문제를 생각해보자. 북촌 한옥마을 등 오버투어리즘이 이야기되는 지역들은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쓰레기 문제, 소음과 사생활 침해, 교통 체증, 주택 가격 상승 등 지역 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커졌다. 산업적 논리만을 따른다면 '더 많은 관광객 유치'가 성공적인 관광 정책의 척도가 되겠지만,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는 지역 주민의 삶의 질과 지속가능성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진보적 관점에서 바라본 관광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다. 진보적 관광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살펴보자.
관광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8%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항공 여행은 상당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진보적 관광 정책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한다. 탄소 상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여행사 지원, 친환경 교통수단을 활용한 여행 코스 개발,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숙박시설 인증제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라이트 셰임(Flight Shame)' 운동은 비행기 여행의 환경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 근거리 여행에는 기차와 같은 저탄소 교통수단을 이용하자는 운동이다. 이는 관광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진보적 접근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2025년 2월에 출간된 임영신 대표의 "기후여행자"에서도 여행과 기후 위기에 대한 관계성과 이를 공정관광으로 접근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지금까지 여행자들이 '어디로',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를 주로 생각했다면, 여행이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적게, 깊이, 오래 머물 건지 상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광업계나 관광학자들이 모두 동의하진 못하더라도, 관광의 미래를 위해 한 번쯤은 고민해보아야 할 내용이라 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인구감소 문제는 특히 지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진보적 관광 정책은 관광을 통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궁극적으로는 지역 인구 유출을 막고 새로운 인구 유입을 촉진하는 방향을 모색한다.
일본의 '시골 마을 체험' 프로그램이나 이탈리아의 '슬로 시티(Cittaslow)' 운동은 관광을 통해 지역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사례다. 이런 접근법은 단순히 관광객 유치가 아닌,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12월 10일 파리 샤요궁에서 열린 제3회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전 세계에 만연하였던 인권침해 사태에 대한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고,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유엔 헌장의 취지를 구체화 하였다. 이 세계인권선언의 제24조에는 다음의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관광에 적용한 것이 '관광기본권'의 개념이다. 진보적 관광 정책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관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의 '휴가 바우처' 제도나 한국의 '근로자 휴가 지원 사업'과 같은 정책은 저소득층도 관광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한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관광 환경 구축도 관광기본권을 실현하는 중요한 과제다.
보수적 가치는 흔히 '변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지키고 급격한 변화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보수라는 관점이 오염되어 마치 극우나 파쇼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가져가는 것이며, 이를 관광에 접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관광에서 보수적 가치는 어떻게 발현될까?
관광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 훼손되거나 상업화되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관광 접근법은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존중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부탄의 관광 정책은 '고가 저밀도(High Value, Low Volume)' 전략을 통해 하루 관광세를 부과하고 관광객 수를 제한함으로써 자국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무분별한 관광 개발을 지양하고 국가의 문화적 가치를 지키는 보수적 접근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헌법 제310조에는 관광과 관련한 조항이 언급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베네수엘라 헌법 제310조에는 "관광은 국가적 관심 분야이자 국가 발전에 있어 최우선적(고우선순위) 경제활동으로 규정된다. 국가는 관광을 경제적 다양화 및 발전을 지원하는 핵심 요소로 장려하고 촉진해야 하며, 이때 사회·환경적 기준도 고려해야 한다. 국가는 관광의 촉진과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보수적 관광 정책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단계적이고 신중한 발전을 선호한다. 지역 공동체의 수용력을 고려하고, 과도한 개발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같이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는 도시들이 도입한 관광객 수 제한, 입장료 부과, 관광세 징수 등의 정책은 무분별한 팽창보다 지속가능한 균형을 추구하는 보수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관광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부터 결제, 가이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심지어 VR/AR 기술을 통해 실제로 방문하지 않고도 관광지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전환은 편의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관광의 본질인 '사람과의 만남과 교류'가 약화될 위험이 있다. 진정한 관광 경험은 기술로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 인간적 만남과 감동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을 도구로 활용하되, 그것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안내판이 전문 가이드의 생생한 설명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기술은 보조적인 역할로, 인간적 교류와 경험의 깊이를 더해주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관광은 종종 권력의 불균형을 반영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국가의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를 방문하는 패턴은 자칫 식민주의적 관계를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선진국의 관광객'과 '개발도상국의 서비스 제공자'라는 구도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
진보적 관광은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를 인식하고,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광 방식을 모색한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는 공정여행,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 여행 등이 그 예다.
태국의 일부 소수민족 마을에서는 과거 '인간동물원'처럼 운영되던 관광에서 벗어나,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커뮤니티 기반 관광 즉, CBT(Community Based Tourism)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관광의 주체를 외부인에서 지역 주민으로 옮기는 탈식민주의적 접근의 한 사례다.
매우 오래된 관광의 고전 론 오그라디의 "제3세계의 관광공해"에서는 주로 선진국(부유한 국가)에서 제3세계(개도국)로 향하는 여행 형태 안에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적 권력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관광객(외부인)이 현지 문화를 ‘소비’하거나 지역사회를 ‘구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종속과 외화 유출, 문화 상품화와 왜곡, 사회적 문제와 윤리적 갈등 등을 언급하며 관광에 대한 폐해와 식민주의적 관광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다.
새가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듯이, 관광도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가치의 균형 속에서 발전해야 한다.
진보적 가치는 관광이 기후위기, 인구감소, 불평등과 같은 현대 사회의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촉구한다. 보수적 가치는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급격한 변화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치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어떤 접근이 더 적합한지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때로는 과감한 변화가, 때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 대응이나 관광노동자 인권 보장과 같은 사안에서는 보다 진보적인 접근이 요구될 수 있다. 반면, 지역 문화의 상업화 방지나 오버투어리즘 관리와 같은 문제에서는 보수적 가치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동시에 기존의 관광 방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이' 여행하는 것보다 '의미 있게' 여행하는 것, 멀리 가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깊은 경험을 하는 것의 가치가 부각되었다.
이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대량 관광에서 의미 있는 경험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진보적 가치(환경 부담 감소)와 보수적 가치(지역성 존중)가 조화롭게 결합된 새로운 관광 모델을 제시한다.
코로나19 시기 한국관광공사에서 제시한 지역관광 상생지표는 활성화되지는 못하였어도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2020년 지자체 관광경쟁력 진단체계 개선 연구에서 그동안의 관광객의 정량적 체계에서 발전한 지역관광 상생지표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지표에서는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모두 행복한 지속가능한 상생관광을 비전으로 보고, 핵심적인 가치로는 지역의 고유성, 열린 형평성, 지역의 역량, 지역주민과 관광객의 상생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코로나19 이후의 관광 가치를 지역과 함께 하고 정성적인 가치를 주요하게 본 것이다.
관광 개발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와 같은 방식으로 관광 수익의 일부가 지역사회에 재투자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강원도 평창군 바우리 마을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관광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마을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수익을 공동체에 환원하는 성공적인 사례다. 이처럼 지역 주민이 관광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모델이 확산되어야 한다. 또한 꽤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관광두레 주민사업체 모델도 훌륭한 지역사회 참여 매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환경 보호와 지역 문화 보전에 기여하는 관광 사업체를 인증하고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관광객들은 책임 있는 선택을, 사업자들은 지속가능한 운영을 실천할 동기를 얻게 된다.
코스타리카의 '지속가능한 관광 인증(CST)' 제도는 호텔, 여행사 등 관광 사업체의 환경적, 사회적, 문화적 지속가능성을 평가하여 등급을 부여한다. 이러한 제도는 관광 산업의 책임 있는 발전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관광은 서비스 노동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이다. 그러나 종종 관광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는 간과된다. 계절적 변동성이 크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관광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노동 정책이 필요하다.
스페인의 발레아레스 제도는 호텔 객실 청소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침대당 청소 시간 보장'과 같은 규제를 도입하여 노동 강도를 완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처럼 관광 노동의 특성을 고려한 구체적인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발레아레스 제도 호텔·식음료업(Hostelería) 부문 단체협약(Convenio colectivo de hostelería de las Illes Balears)에는 객실 청소 인력의 작업 부하를 줄이기 위해 시간·건강·노동 강도 등의 지침을 추가하였는데, 청소 가능한 객실 수 상한을 설정하거나, 베딩/객실 관리 시 필요한 최소 작업 시간을 명시함으로써, 무리한 물리적 노동이 강요되지 않도록 하는 취지라 할 수 있음
디지털 기술은 관광객에게 개별적으로 즐기더라도 훌륭하고 표준화된 안내와 해설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각종 예약이나 결제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게다가 아날로그 콘텐츠에 디지털 기술을 더하여 보다 새로운 관광콘텐츠의 풍성함을 더할 수 있다. 디지털 전환이 그동안 관광의 새로운 화두였던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디지털 기술은 도구일 뿐, 관광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인간적 만남과 교류를 대체하기보다 보완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관광은 사람과의 교류이고, 이는 결국 아날로그적인 힘, 오프라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디지털 기술과 관광의 본질을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해야 하는지가 상당히 중요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관광이 진보인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에 단일한 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관광의 가치와 방향성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 중심의 관광,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관광,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관광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가치를 상황에 맞게 균형 있게 적용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관광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며, 실천해야 한다. 관광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나가야 할 것이다.
관광의 본질, 쟁점과 대안은 매주 목요일에 연재하도록 합니다. 본 연재글에 대해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달아주세요~ 환영합니다.
관광의 본질적 접근도 좋지만, 관광개발이나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관광사업을 어떻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관광사업 진단체계모델 이야기도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