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관광의 미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관광진흥법이 규정한 여행업, 관광숙박업, 국제회의업으로 대표되는 전통관광산업은 그동안 대한민국 관광 발전의 주축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여행이 일상화되고 관광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이제는 무지 호텔을 만드는 무인양품, 까사 깜빠르를 운영하는 캠퍼, 시몬스 테라스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시몬스까지 등장했다. 관광산업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금,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때다.
전통관광산업은 수십 년간 축적된 노하우와 체계적인 서비스 구조를 바탕으로 관광객들에게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경험을 제공해왔다. 여행사는 복잡한 여행 계획을 대신 세워주고, 호텔은 표준화된 서비스로 어디서나 일정한 품질을 보장했다. 국제회의업은 MICE 산업의 전문성을 키워 비즈니스 관광의 핵심 인프라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전통관광산업의 가장 큰 강점은 '신뢰성'이다. 관광객들은 예상 가능한 서비스와 표준화된 품질을 통해 안심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문적인 여행 지식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관광객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현재의 관광객들은 단순히 '가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광객들은 획일화된 패키지보다는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이 반영된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 이들에게 호텔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감성적 경험의 무대이고, 여행은 남들과 다른 나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전통관광산업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기존의 안정적이고 표준화된 서비스 방식으로는 새로운 관광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워졌고, 그렇다고 급진적 변화를 시도하기에는 기존 고객층과의 괴리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일본의 무인양품이 2019년 도쿄 긴자에 선보인 무지 호텔은 융복합 관광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이 호텔의 모든 공간은 무지의 철학인 '좋은 감각의 생활용품'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객실의 가구와 어메니티는 물론 조명 하나까지 무지 제품으로 구성했다. 투숙객들은 단순히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무지라는 브랜드의 라이프스타일을 24시간 온몸으로 체험한다.
무지 호텔의 핵심은 '브랜드 이머시브 경험'이다. 소비자들이 매장에서 몇 분간 만져보고 구매하는 것과 달리, 호텔에서는 하루 종일 무지 제품들과 함께 생활하며 브랜드의 가치를 깊이 체감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투숙객들이 체크아웃 후 호텔에서 사용했던 제품들을 구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페인의 신발 브랜드 캠퍼가 바르셀로나와 베를린에서 운영하는 까사 깜빠르는 또 다른 혁신 사례다. 이 호텔은 침실과 거실이 분리된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었고, 캠퍼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창의적인 디자인 철학이 곳곳에 녹아있다. 객실 내 가구와 조명, 심지어 수건까지 캠퍼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반영한다.
까사 깜빠르의 성공 요인은 '브랜드 스토리텔링'에 있다. 캠퍼는 단순히 신발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브랜드임을 호텔 경험을 통해 전달한다. 투숙객들은 캠퍼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더라도 브랜드의 철학과 감성에 공감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브랜드 로열티로 이어진다.
메리어트와 이케아의 협업으로 탄생한 목시 호텔은 '접근 가능한 디자인 호텔'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조했다. 이케아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과 실용적 철학을 바탕으로, 합리적 가격에 세련된 숙박 경험을 제공한다. 객실의 가구 대부분이 이케아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조화와 기능성을 고려한 공간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목시의 혁신은 '가성비 럭셔리'라는 개념에 있다. 기존 디자인 호텔들이 높은 가격으로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면, 목시는 이케아의 대중적 접근성을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공간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례가 등장했다. 침대 브랜드 시몬스가 경기도 이천에 조성한 시몬스 테라스는 '브랜드 체험 관광지'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서 시몬스 제품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시몬스 테라스의 핵심은 '제품 체험의 일상화'다. 방문객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정원을 거닐며, 다양한 침대에서 실제로 누워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체험 과정에서 시몬스 제품의 품질과 브랜드 가치를 몸소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 중 상당수가 시몬스 제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인(Pine)과 길모어(Gilmore)가 제시한 경험경제 이론에 따르면, 현대 소비자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넘어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브랜드들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접점을 찾고 있다.
관광은 이러한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기에 최적의 플랫폼이다. 여행 중인 소비자들은 평소보다 더 개방적이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수용성이 높다. 또한 비일상적 공간에서의 경험은 더욱 강렬하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브랜드들이 관광산업에 뛰어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브랜드 확장은 유사한 제품군으로의 진출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관광으로의 확장은 제품의 영역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브랜딩하는 전략이다. 무지 호텔에 머무는 고객은 무지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제안하는 삶의 방식을 경험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브랜드 인지도와 로열티를 동시에 높이는 효과가 있다. 단순한 광고나 마케팅 캠페인과 달리, 관광을 통한 브랜드 경험은 고객의 감정과 기억에 깊숙이 각인된다. 결과적으로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브랜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전통관광산업이 융복합 관광의 도전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 방법은 적극적인 협업이다. 호텔들은 이미 다양한 브랜드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특정 층을 브랜드 테마로 꾸미거나, 브랜드 전용 패키지를 개발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일부 호텔들이 로컬 브랜드와의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제주도의 한 호텔은 지역 화장품 브랜드와 협력해 객실 어메니티를 특별 제작하고, 투숙객들에게 브랜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협업은 호텔에게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브랜드에게는 새로운 고객 접점을 제공하는 윈-윈 전략이다.
전통 호텔업계는 이제 단순한 숙박 서비스를 넘어 '경험 디자이너' 역할을 해야 한다. 객실의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체크인부터 체크아웃까지의 전 과정에서 일관된 스토리를 전달해야 한다. 이는 호텔만의 고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공적인 경험 디자인의 핵심은 '진정성'이다.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이나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가치를 바탕으로 한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옥 호텔이라면 전통 문화의 깊이 있는 체험을, 도심 비즈니스 호텔이라면 효율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공간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AI, VR, AR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서비스 혁신도 중요하지만, 관광의 본질인 '인간적 경험'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기술은 효율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되, 관광객과의 진정한 소통과 감동은 여전히 사람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AI 컨시어지가 기본적인 정보 제공과 예약 업무를 담당하되, 특별한 경험이나 개인적 추천은 숙련된 직원이 직접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접근법은 운영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인간적 터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앞으로의 관광산업은 기존의 업종 구분이 무의미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호텔, 리테일, F&B, 엔터테인먼트, 문화 콘텐츠가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 제공되는 '경험 생태계'가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각 기업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과 가치를 찾아야 한다.
전통관광산업은 이 생태계에서 '경험 오케스트레이터'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양한 브랜드와 콘텐츠를 연결하고 조율하여 관광객에게 일관되고 완성도 높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중개업을 넘어 경험 전체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융복합 관광이 확산되면서 지역의 정체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도 이제 단순히 자신들의 가치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특성을 존중하고 융합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전통관광산업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브랜드와 지역 문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로컬 경험을 원하는 관광객들과 지역성을 추구하는 브랜드들 사이의 가교 역할이 바로 전통관광산업이 가진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관광산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전통관광산업이 가진 전문성과 안정성은 여전히 중요한 자산이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변화하는 관광객의 욕구를 이해하고, 새로운 브랜드들과 협력하며, 기술과 인간적 경험을 조화시키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무지 호텔, 까사 깜빠르, 시몬스 테라스의 성공은 단순히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라 관광의 본질적 변화를 보여준다. 관광객들은 이제 단순히 '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을 원한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전통관광산업과 융복합 관광산업은 경쟁이 아닌 상생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각자의 강점을 인정하고 활용할 때, 관광산업 전체가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할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관광의 지평을 여는 도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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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부터는 적극적인 대안 네 번째 주제이다.
" Top-down과 Bottom-up 사이에서의 관광"
관광은 위에서부터 만들어야 하는 정책과 사업일까? 밑에서부터 의견을 수렴해서 가져가야 하는 정책과 사업일까? 관광을 접근하는 방법에서 오피니언 리더와 선지적 투자가 수요를 이끌게 될지, 수요를 통해 관광이 활성화가 될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본다.
관광의 본질, 쟁점과 대안은 매주 목요일에 연재하도록 합니다. 본 연재글에 대해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달아주세요~ 환영합니다.
관광의 본질적 접근도 좋지만, 관광개발이나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관광사업을 어떻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관광사업 진단체계모델 이야기도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