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초등학교 나온 사람 이야기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은 반장, 미화부장, 선도부장 등 각종 '장'들을 많이 뽑았고 그것도 학기마다 바꿨다. 우리 반 정원이 40여 명이라는 점과 각종 장의 수를 종합해 보면 학생의 절반 정도는 감투를 한 번씩 쓸 수 있게 하는 구조였다. 그 높은 확률에 기인하듯이 나도 1학기 '미화부장'이라는 멋들어진 감투를 하나 쎴다. 당시에는 설레고 기뻤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 중 일부를 아이들에게 전가하기 위한 술수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초등학교는 나무 마룻바닥을 썼는데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씩 왁스를 펴 발라서 나무 바닥을 반들반들하게 만들어 줘야 했다. 그 왁스 통을 포함한 각종 비품들이 교실 뒤 창고에 쌓여 있는데 다 쓰거나 망가진 비품을 채우는 걸 '미화부장'인 내가 했다. 아마도 그런 허드렛일을 시키기 위해 미화부장이라는 감투를 주었을 테다. 반면에 선도부장은 교실 칠판에 '떠든 사람'을 적을 수 있는 권력이 있었는데 그 데스노트에서 선도부장과 친한 애들을 빼줄 수 있는 정도의 권력이 있었다. 미화부장은 잘해봤자 본전인 자리였다.
내 생각에 미화부장은 선출직인 반장과 달리 미리 손재주 시험 같은걸 보고 뽑아야 하는 자리 같았다. 달마다 교실 뒤의 초록색 부직포 판(이걸 '솜씨 뽐내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을 아이들의 그림이나 공작물로 꾸몄는데, 그때마다 '미화부장'에게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내가 미화부장으로 뽑히고 나서 엄마가 작게 한숨을 쉬었던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일 거다. 그 시절 초등학생들의 숙제는 엄마들이 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엄마는 신발주머니 만들기, 콩주머니 만들기에 이어 '교실 뒤에 걸려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 만들기'라는 미션까지 떠맡은 셈이다. 그러니 사실 우리 교실 뒤의 '솜씨 뽐내기'는 '(우리 엄마) 솜씨 뽐내기'로 바뀌어야 맞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감투였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미화부장 시절의 나는 참 진지하게 임했던 것 같다. 우습게도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20년도 더 된 옛날에 뽑혔던 미화부장 시절이 생각날 정도니 말이다. 작은 자리라도 그 나름의 스트레스와 책임감이 수반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유지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다. 새로운 대통령이 부디 우리나라를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