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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Mar 04. 2020

초현실, 사고

- 알폰소 폰세 드 레온 '사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훈식은 전방주차로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회색 벽을 바라보았다. 매끈해 보이는 벽은 근거리에서보니 자잘하게 흘러내리는 페인트로 울퉁불퉁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경식은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분위기 보고 영 아니면 돌아나오면 되지. 유치한 자문자답에 그는 씁쓸히 웃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예민과 소심을 오가는 자신의 모습이 답답해졌다. 그래 가보자, 답답함을 풀기 위해 찾아온 곳이니.


-크리스틴의 카운슬링 센터

인터폰을 누르자 벽돌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미소지었다. 예약 십분전이었다. 차분한 그린톤의 응접실에 앉아 그는 잠시,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영동대교는 짙은 미세먼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오죽하면 니가’. 이곳을 소개해준 이모는 어두운 얼굴로 덧붙였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뭐든 잡아야 했다.


기록이 남는 병원은 두려웠다. TL그룹 차남이 정신과진료를 받았다는 말이 돌 수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벽돌색 정장의 여자를 따라 응접실 저편에 깊숙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샤갈의 그림이 있는 아늑하고 소박한 사무실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미소지었다. 크리스틴 이었다.


“궁금하신 것을 물어봐도 좋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알려드리고, 들어드릴 수 있는 건 들어드립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심지가 깃든 저음이었다. 건강하고 윤기가 흐르는 여자라고 훈식은 생각했다. 역술가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편안함이 있었다. 훈식은 테이블에 놓인 하얀 찻잔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틴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린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녀의 잘 손질된 손톱을 바라보았다. 짧게 깎아 잘 손질된 분홍빛 손톱, 가늘고 긴 손이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했다. 청결하고 정갈한 어머니, 잘 웃고 유쾌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형 경식은 어머니의 죽음에 냉정했다.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할 장남이었다. 거기에  앞으로 국내 서열 10위 안에 있는 대기업 TL그룹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형의 욕심을 알고 있었다. 모나고 괴팍했지만, 그 이상 영리했다.


회사나 재산에 별 관심이 없던 훈식은 일찌감치 유학을 떠났고, 계열사 호텔 운영에 관심이 있다는 명목하에 호텔경영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요리공부를 실컷 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재료들, 도구들에 흥분하는 그를 경식은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애써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아버지를 꼭 닮은 형은 아버지와 똑같이 다혈질이었지만 또 아버지 앞에선 누가 뭐랄 것 없이 순종적이었다. 그런 부자사이를 오가며 어머니는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 우울이 나를 지우고 있다. 그것이 나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스스로 먼저 떠난다.


어머니 답지 않은 유서라고 훈식은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번의 필적조회를 통해 어머니 것임이 분명하다고 판명되었다. 가벼운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눈물보다 불같이 화를 내며 어머니를 저주 했다. 왜 계열사 호텔에서 그런 망신스런 일을 벌인거냐며 영정 사진을 놓고 분통을 터뜨렸다. 형은 무서울만큼 냉정하게 조용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수사도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언론에 보도된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언니, 경식이 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어. 그 성격에 나한테도 절대 말을 안해. 너희 형 냉정한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그런게 아니었다고. 너는 뭐 아는거 없어?”

이모는 넋나간 얼굴로 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아버지에겐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눈물을 보이며 경식과 이야기 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소와 비웃음 뿐이었다.


“엄마나 너나 똑같아. 나약해 빠져서 자기 생각밖에 안하지.”

슬픔에 더한 석연치 않은 직감,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우울함과 절망감에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쩔줄 모르는 그에게 이모는 크리스틴의 연락처를 쥐어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곳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보지 못한 걸 볼 수 있는 곳이고.”


땀을 닦는 듯 눈가를 훔치는 훈식을 보며 크리스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몸에서 이끼색 빛이 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묘하지만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훈식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벽에 걸린 샤갈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샤갈의 서커스. 그린색의 동심원 위로 떠 있는 푸른 얼굴과 붉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기묘한 서커스를 조종하는 자, 혹은 조롱하며 홀로 웃고 있는 자. 분명 단순한 자살이 아닐거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당신 생각이 맞을 겁니다. 사실, 순수한 자살은 없죠. 마음이건 몸이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유린당하며 비참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 어머니도 그중 한명입니다.”

저런 애매모호한 말. 훈식은 고개를 저으며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댔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온 건 아니었지만 맥이 빠졌다. 크리스틴의 눈빛과 초록 기운이 좀 더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넵니다. 당신의 무의식을 받아 읽었어요. 그것을 ‘초현실’이라고 표현하죠. 그래요, 이번일의 진상을 알게되면 아마 당신은 초현실을 떠올릴거에요. 어머니는 자살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에게 부적을 보여줄께요.”


그녀는 아이패드를 들어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다. 푸른 양복을 입은 콧수염의 사나이가 돌에 한쪽 머리를 부딪히고 피를 흘리고 있다. 그는 막 사고가 난 듯 찌그러진 자동차의 창문으로 흐르듯 빠져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죽었을까? 한손으로 움켜쥔 마른풀과 뒤에 깔린 거친 철조망이 그의 운명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죽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창밖을 한번 보고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가는요. 그림을 그린 직후에요. 운명을 예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머니의 유서도 아마 그럴거에요. 어머니가 쓴 것이 맞습니다.”

“이걸 왜 보여주시는 겁니까?”

훈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알고 싶은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으면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그는 죽음으로도 치를 수 없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녀는 극도로 피곤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곧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작은 아파트엔 토마토와 올리브오일, 마늘 볶는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정확히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버지와 형 그 누구도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49제를 지내는 일은 없었다.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도 혼자만이라도 어머니의 49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다음생에선 좀 더 따뜻한 가족들과 함께 하길.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어머니의 사진을 놓고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그가 만든 파스타와 콜라를 올렸다. 잘 익은 토마토를 살짝 으깨고 마늘과 함께 올리브오일에 볶는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페퍼론치노로 매콤함을 더한 아주 심플한 파스타였다.


“파스타면은 아주 넉넉하게 많이! 난 식당에서 예쁘게 말아주는 그 한입거리들이 싫어. 면은 씹지 않아도 넘길 수 있도록 충분히 익혀야지.”

그가 서울에 오면 어머니는 야식으로 그의 파스타를 주문했다. 그리고 콜라. 창고 테라스에 있는 보조 냉장고에 은밀히 숨겨둔 캔콜라를 어머니는 벅찬 얼굴로 따곤 했다. 콜라는 꼭 캔 그대로, 한껏 들이키며 기분 좋게 구겨지던 미간의 주름. 그는 눈물을 흘렸다. 한국엔 될 수 있으면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커다란 파스타 접시에서 쉴새없이 오르던 김이 잦아들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


핸드폰에 저장된 문자와 톡, 사진들로 그는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형과 함께 술을 마시던 여자가 죽었다. 둘이 술 외에 다른 무언가를 했을 가능성이 컸다.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이 들어갔고 어머니 명의의 주식과 재산이 처분되었다.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형에게 아버지는 신이었다. 어머니의 입을 막아야 했다. 대화에서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호텔에서 식사를 했다. 술을 한잔 했고, 속이 좋지 않다는 아들을 데리고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가겠다는 어머니를 두고 형은 먼저 나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오지 못했다.


초현실.


크리스틴, 그녀가 말한 그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용돌이치는 초현실에서 그는 뜬 눈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과 통증이 그의 의식을 분리한다. 그는, 바로 앞에서 총알이 통과하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생생히 마주하고 있다. 찢어지고 터진다. 그리고 분노한다. 온 몸의 핏줄이 실밥 터지듯 하나씩 섬세히 터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폭파한 머리통은 함부로 따올린 토마토캔처럼 녹슬고 너덜거리는 양철파편에 붉은 것들이 그저 흘러내린다.


그는 주저앉는다. 눈앞의, 피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허공으로 천천히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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