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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Sep 15. 2020

책들이 퍼덕거리는 비둘기 날개처럼 불타며 죽어가고 있다

- <화씨451> 레이 브래드버리

사람들이 갈수록 책을 안 읽는 추세에 대해 염려의 목소리가 많다한편으로 교양 콘텐츠를 활자 매체로 습득하던 구텐베르크 마인드의 시대가 가고이제 영상 매체를 기본으로 삼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는 관측도 존재한다어쨌든 과학 기술이 가속 발달하는 시대는 문명사적 전환을 강하게 암시한다이런 시대에 여전히 레이 브래드버리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면 바로 자유로운 시인의 마음으로 과학 기술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야 해서 일 것이다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p96 박상준레이 브래드버리 편     



책이 사라져버린 디스토피아     


보람있는 일이죠월요일에는 밀레이를수요일에는 휘트먼을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우리들의 공식적인 슬로건이죠. (p23)          


SF와 책,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의 자아찾기 같은 소설이라니, 이 책이 나온 시기를 생각하면 놀랍다. 1950년대 미국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였고, 출판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 최고의 호황을 맞은 미국의 풍요속에서 향락적이 된 삶, 그리고 그 틈새에서 벌어지던 세계적 파시즘의 폭력을 묘사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어느 시대적, 국가적 배경을 놓고 바라봐도 다양한 은유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종이책의 종말은 이미 촌스러운 논의가 되고 유튜브나 디지털 매체들에 휘둘리고 사로잡힌 우리의 현실에서 깊은 공감이 가능한 작품이었다. 소방수와 방화수, 그 절묘한 역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불을 끄던 소방수라는 직업은 이제 충분히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으로 사라지고 물이 불로 바뀌며 불태우는 직업 ‘방화수’로 바뀌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불태워야 하는 대상은 바로 ‘책’! 풍요의 시대 모든 것이 넘쳐나고 발전한 디지털 기술은 거실 벽의 삼면. 혹은 사면을  TV로 바꾸고 사람들을 온통 빠져들게 만든다. (작품에서는 일단 TV가 쉴새없이 정보와 자극을 쏟는 매스미디어를 대표한다) 여기에 늘 외부세계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이어폰이 있기 때문에 힘들게 책 따위를 볼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런 불편하고 불온한 매체는 없어져야 한다! 방화수는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책을 불태우는 것이다.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헌법에도 나와 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그리고 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움츠러들거나 스스로에 대리되는 판결을 내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그래바로 그렇기 때문이야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태워 버려야 돼. (p118)     



그러나 방화수 가이 몬태그는 자신의 직업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책을 위해 누군가 목숨을 던지거나 외압에 의해 죽어가는 일들을 목격할수록 궁금증은 커진다. 자신에게 행복과 책에 관해 묻던, 자연과 세상에 대해 생명력 넘치는 옆집 소녀 클라리세의 죽음을 알게 되며 직업과 세상에 대한 회의는 커져간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종일 거실의 삼면에 설치된 TV를 가족처럼 여기며 이어폰을 꼽고 살아가는 아내를 보며 그는 ‘행복하다’고 대답한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몰래 빼돌린 책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방화서장 비티의 추적과 부인 밀드레드의 신고로 집과 책은 불타게 되고, 그는 직업을 잃고 노숙자가 된 철학교수 파버를 찾아 간다. 도망자가 된 몬태그의 여정이 시작된다.      




보다와 인식하다’, 그리고 존재하다


책과 디지털 매체들을 감각하는 방법은 같다. 보는 것이다. 이후 자극의 정보의 처리 방법에 있어 차이가 나게 되는데 파버 교수와의 대화가 여기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첫 째, 정보의 질과 짜임새, 내용이 양질이어야 하고 두 번째로 사색을 위한 여가시간을 확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책속의 미래에선 워낙 자극적이고 즉물적인 티브이와 디지털매체들이 현실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만다.(사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심해졌다. 오히려 책 중에 SNS나 인스타그램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도 많다. 현실을 넘어 자본이 흐르는 대로 한데 섞여버린 느낌이다.) 비티 서장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부연한다. 최근의 유튜브나 디지털 매체들에 대해 느끼는 것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 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p114)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위 두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얻어지는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책에 대해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핵심일 듯 싶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인간 사고의 흐름은 영상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디지털 매체보다는 책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되새김의 여유를 갖고 충분히 사색하는 일, 또다시 곱씹고 다른 텍스트나 사고와 결합하는 것 등이 그렇다. (이건 디지털 매체의 단순한 하이퍼링크와는 차이가 있다.)

    

‘보다’라는 작용으로 이렇게 인간에게 들어온 책은 자신과 타인, 세상,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단순한 지각작용이 아닌 ‘인식’과 ‘깨어남’의 적극적인 독서가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존하는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의 행복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상상할 것, 창조하고, 공감할 것.


한편 비티서장의 소수자에 대한 비하, 그리고 후기에 소수자 단체들의 책에 대한 반발을 문제 삼은 것에 대해 논란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면적인 개인과 사회에 대한 발언으로, 이 모든 논란에도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는 작가의 적극적인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책과 일관되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애정과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적극성은 열정을 넘어선 순수한 감동을 더해 주었다.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제트카를 타는 사람들은 풀이 어떻게 생겼는지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를 거예요왜냐면 그 차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바깥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가 없거든요 (p 25)     


... 갑자기 울기 시작할 것이다밀드레드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그런 죽음을 당해서도 울지 않는 자신이 슬퍼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바보같은 남편이 바보 같은 아내의 죽음을 당하면 그런 식이 될까.

(p85)     


소년과 같은 열정과 순수함은 내용은 물론 문체에서도 드러난다. 감정을 풍부히 담은 문장들은 ‘책’이 사라진 시대라는 주제와 어우러져 더 큰 감동을 준다. 비를 맛보는 소녀를 떠올리며 같은 모습으로 내리는 비를 맛보는 몬태그의 모습, 아무 생각없이 TV에 빠진 부인의 친구들에 대한 분노, 비티 서장이나 파버와의 격정에 찬 대화 장면은 인식의 격정에 차오른 주인공의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볼이 붉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묘사한 아름답고 섬세한 문체는 비교적 거친 번역임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단순한 SF 장르 소설이 문학작품의 풍성한 결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나에겐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도록 만드는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           



그 연극은 어떻게 끝나지행복하게 끝나나?(p46)     


핵폭발 이후의 세상에 ‘불사조’처럼 남은 ‘휴먼북’의 그들은 책을 담고 있는 기억을 안고 먼 여정을 떠난다. ‘자신들의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p281) 끝은 알 수 없다 다만, ‘천하게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때와 말 할 때, 그래.’ 전도서를 읊조리며 다만 간직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며 ‘열매와 잎사귀’를 맺을 수 있는 정오의 도시를 꿈꾸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들의 낭만주의가 실패한 시도로 끝날지라도 인간이 가진 사유의 힘을 믿고 행동하는 이상 그 무엇도 실패는 아닐 것이다. 소설이 나오고 15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몬태그의 여정은,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력한 디지털문명과 핵폭발에도 끄떡없는 인간의 실존을 여전히 믿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화염속에서 잔인하게 일그러지던 미소는 이제 사라질 것이다. 나는 불에 그을린 미소에서 해방되었다.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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