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조덕배의 원곡 가사에서 느낀 것들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의 아이유 리메이크 버전을 출근하면서 들었다.
조덕배의 원곡도 좋지만 아이유의 리메이크도 참 괜찮은 것 같다.
조덕배의 원곡은 1986년에 나왔고 나는 이때 초등학생이었으니 이 노래의 선율 같은 건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가사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가사가 귀에 많이 들어왔고, 들으면서 "이건 참 요즘에 보기 드문 (80년대) 정서야..."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이 부분인데, 이 노래의 발신자는 수신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레코드나 라디오를 통해 간접적으로 발신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잘 전달이 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운 좋게 의도한 수신자가 이 메시지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게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인지 아닌지는 수신자가 감으로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잘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시에도 남는 문제는 시간차다.
노래를 부르는 시점과 수신자가 듣는 시점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 길면 몇 년 몇십 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수신자가 메시지를 듣는 시점에, 발신자의 메시지에 호응할 마음이 있더라도 그/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왜냐하면 발신자와 만나지 못한 그 사이에 발생했을, 발신자의 상태의 변화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이 가사가 나온다.
난 이 부분에서 뭔가 신선함 같은 걸 느꼈는데, 요즘에는 이런 정서가 정말 드물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인내심이나 끈기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발신자의 메시지가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발신했을 때의 태도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 이것은 어떻게 보면 (포기에서 나오는) 여유 같은 게 아닐까.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라는 것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건 자유다. 사랑받는 이에게 똑같은 사랑을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이 노래에서는 사랑받는 이에 대한 강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가 느껴진다.
심지어 그 자유는 무한대로 구현되어 있다.
요즘에는 이메일, 문자, 채팅앱에서, 발신자가 수신자를 정확히 찍어서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보내고, 메시지의 수신 여부도 역시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수신자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빨리 답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빨리 안보내면 나도 불안하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 그냥 삶의 일부로 안고 살았던 부분들 -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 훼손되거나 변질될 가능성, 그리고 수신 시점과 발신 시점 사이의 딜레이- 이 모든 것이 일으키는 묘한 설레임, 애태움, 안타까움... 이러한 것을 ‘불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만큼 인내를 감수했고, 그만큼 메시지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수신인의 반응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혹은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물론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과연 무제한의 실시간 메시징이 과연 커뮤니케이션의 질을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