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나이 95세, 아내의 나이 91세! 결혼 64주년 기념여행을 떠나는 날! 남편은 27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행지로 쿠사다시를 제안하였다.
이제야 그 꿈이 이뤄지다니! 사람은 오래 살아볼 일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64년째 한 남자와 살아온 내 인생이 더 감격스러울 뿐이다. 우리 부부가 백년해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인연의 동아줄은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궁합이 맞았기에 가능한 것 같다. 곧 다가올 백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이번 여행지는 내 생애 못다 이룬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2022년 11월! 우리는 튀르키예 여행 중이었다. 여행의 여정에는 쿠사다시에서 그리스로 가는 일정이 있었다. 그해 우리는 그리스를 지척에 두고 문제가 생겼다. 이스탄불에서 장장 8시간 반을 버스를 타고 다음날 새벽 6시 반에 쿠사다시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리스행 배의 오픈 시간이 8시여서 인근 식당에서 쵸르바(렌틸콩 수프)로 아침을 대신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은 날씨와 함께 왔다. 창밖에는 늦은 가을비가 부술부술 내리고 매표소는 감감무소식이다. 뜻밖의 상황에 안내소로 항구로 수소문을 해도 그리스로 가는 배는 없단다. 관광 성수기가 4월에서 10월까지 라니? 우리 둘 다 여행 시즌을 확인해보지 못한 실수였다. 아쉽게도 숙박비를 아낀다고 야간 버스를 타고 와서 몸은 천근만근인데 이를 어쩌나! 그리스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다시 이스탄불에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니! 바로 지척의 거리인 10km 남짓에 사모스섬이 보이는데 어찌 갈 수가 없다?
그리스에 대한 미련을 접고 쉴만한 호텔을 찾았다. 호텔은 간이부엌이 있고 넓은 거실과 방이 2개에 욕실도 2개나 되는 스위트룸이었다. 호텔의 가격은 한화 6만 원대로 여름 시즌이 끝나서 가격은 착하고 손님은 극소수였다. 호텔이 위치한 곳은 그 유명한 레이디스 해변과 붙어 있었던 곳이었다.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해변을 향해 걸었다. 해풍이 머리칼을 건드릴 정도의 날씨인데도 인적이 드물다. 우리는 해변을 통째로 전세 낸 기분으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여전히 바다 건너 훤히 바라보이는 사모스섬이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최고의 휴양도시에서 호강을 누리기에는 충분하였다. 해변에는 무신경한 개들이 벤치를 차지한 체 지중해의 낭만에 취했는지 꼼짝도 않고 있다. 레스토랑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불이 켜진 몇 곳이 영업 중이다. 바다와 아주 가까이 있어 뷰가 최고인 레이디 비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지배인은 우리가 첫 손님인양 아주 친절하게 극빈대우를 해준다. 음식 맛 또한 그동안 튀르키예에서 먹어본 요리 중 최고로 맛이 있다. 치킨의 바삭함과 연어구이 밑에 깔아 놓은 무화과가 살구와 어울려 비릿한 생선냄새를 잡아 주고 감자와 치즈가 들어간 그라탱의 쫀득함과 향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우리의 속상한 마음도 살살 녹아 위로가 되었다. 밤바다의 철석이는 파도소리와 해풍에 취한 채 포만과 여유를 느끼며 여자는 남자에게
"우리! 다시 꼭 와요"
남자가 말한다. "그러지! 다시 못 올 것 없지"
우리의 여정은 백세를 앞두고 꿈을 이룰 거라 믿으며 상상의 여행을 기획해 본다.
그리스로 향하는 날! 두 노부부는 아직은 두 다리가 멀쩡하여 아침 일찍 해변을 거닐며 오랜 세월 푸른 잎을 달고 사계의 삶을 살아온 야자수기둥에 기대어 본다. 우리도 이렇게 서로 기대며 살아왔지.
사모스섬으로 가는 티켓은 현장구매 대신 손목에 저장된 칩에서 구매하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호텔에서 제공되는 리무진을 타고 항구에 도착하니 그리스 국기가 그려진 수륙양용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그리스땅을 수륙양용차는 바다와 육지를 지나 십 분 만에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세상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내년이면 사모스섬이 튀르키예의 쿠사다시와 연륙이 된다는 소식도 접한다. 피타고리온 항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이기도 하여 부두에는 삼각형 형태의 피타고라스 동상이 있다. 80년도 더 지난 수학시간에 배운 공식이 궁금하여 손목시계에 피타고라스라고 말하니 그의 생애까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우리는 슬로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무료자전거센터에서 자동식 자전거를 빌렸다. 고대 유적지가 가득한 섬 여행은 자전거가 어울린다. 자전거는 목적지를 입력하니 자율로 움직인다. 시대가 좋아져서 가만히 핸들만 잡고 있으면 된다.
섬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여유롭다. 헤라 신전인 헤라이온은걸어 올라가기로 한다.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적들이 내 나이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에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놀라웠다. 포장된 자전거길은 주변의 야생화와 더불어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사모스섬에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바울의 전도 여행지를 따라가 본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사모스 섬에 들렀다. 그때의 구도자의 심정으로 언덕 위에 교회를 향해 갔다. 교회의 오르간은 고풍스럽고 엄숙함의 정취를 안겨준다. 64 년년 전 우리 부부는 교회에서 결혼을 하였다. 여전히 결혼 서약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시 머리를 숙여 다짐한다. 그토록 사모했던 사모스섬을 유유자적하게 자연의 풍경을 보며 마음에 쉼표를 찍어 본다.
다시 사모스섬을 떠나 로도스섬으로 가는 자율주행지프에 올랐다. 27년 전과 달리 그리스의 섬과 섬이 연륙이 되어 이동이 쉽다. 지프는 목적지가 입력되어 로도스섬에 무사히 데려다준다. 로도스 섬은 휴양지답게 쪽빛 바다와 맑은 하늘이 반긴다. 사방에서 들리는 언어는 다국적이지만 손목의 번역기가 자동번역이 되어 같은 언어로 들린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땅의 풍경들을 기억 속에 담는다. 우리는 최고의 인생샷을 찍기 위해 여러 포즈를 취하지만 왠지 어설프다. 인공지능이 장착된 카메라의 기능이 가장 아름답게 포샵처리를 해주겠지만 그것도 이제 별로다. 그냥 눈으로 담는 게 가장 진실하다. 한국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말을 건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부모님 생각나서 그러니 제가 찍어드릴게요. 저희는 신혼여행 왔어요.” “우리는 결혼 64주년 되었어요.” “어머! 그래요! 젊어 보이시는데요. 30년 후에 다시 오세요. 저희도 그러겠어요.” 젊은이들의 축복에 주책없이 욕심이 나려고 한다. 이스틴불행 경로우대용 비행접시가 미리 예약해 둔 덕분에 출발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기다리고 있다.
이스탄불의 마지막 밤!
이스티클랄거리 단골레스토랑인 마이하우스에서 파티가 예정되어 있어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고 리무진에 오른다. 야호!
튀르키예에 다시 올 수 있겠지!
ㅡ2022.11. 쿠사다시에서 멈췄던 그리스 섬여행을 가상 여행기로 튀르키예 한달살기를 마친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