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슬픔의 방문>
가끔 오래전 우연히 본 TV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되살아나곤 한다. 오랜 세월 책에만 파묻혀 살던 남자 주인공이 집에 가득 쌓인 책들을 모두 내다 버리려는 장면이다. 드라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남자의 마음은 왠지 알 것 같다. 이따금 나도 그런 상상하니까...
나는 관심거리가 생기거나 무언가를 시작할 때 관련 책 먼저 찾아 읽는 타입이다. 하지만 책 속의 말들이 공허한 외침처럼 들릴 때가 있다. 너무도 옳은 말이지만, 아니 너무도 옳은 말이라서 책 속에서만 정의롭고 공정했다. 그렇게 느껴질 때면 책을 모조리 꺼내 화풀이하고 싶어 진다. 그렇게 자주 책과 불화했지만, 여전히 난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68쪽)’ 싶을 때 역시 책을 꺼내 든다. 책은 항상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슬픔의 방문>는 슬픔에 흔들리고 아픔에 좌절하는 현실 속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장일호 작가는 크고 작은 슬픔의 방문에도 불행에 잠식되지 않았다. 살아온 삶을 탓하고 후회하기보다는 그동안 겪은 고통을 ‘자원화’하며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240쪽)고 이야기한다.
상처받는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곤 했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남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슬픔과 나란히 앉는다. p.251
‘불행한 일들이 닥쳐오더라도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 “상처받는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251쪽)어 가고 싶다. 얼굴을 내밀어주는 어른, 곁을 주는 이웃,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나아가고 싶다.
p.54
나 역시 1인분의 책임이 있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됐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p.80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p.95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p.113
그림 속 고양이는 인간의 슬픔을 신경 쓰지 않는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되,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않는다. 고양이의 어떤 무심함이 사람을 살린다는 걸 나는 안다.
p.135-6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p.161
누군가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p.240
병은 내 삶을 흔들어 대고 일정 부분 바꿨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병의 원인을 내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일로 갈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슬픔의 방문>
장일호 | 낮은산, 2022
분야/페이지 | 문학 > 에세이 /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