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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Aug 03. 2024

도망간 나치를 잡는 법

독일 전시 | 뮌헨 이집트박물관의 기획전 《오퍼레이션 피날레》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진행되었지만, 많은 나치 수뇌부는 전범재판에 서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큰 책임이 있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종전을 앞두고 자살했고, 그 외에도 다수의 나치 수뇌부가 해외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추방과 학살 등 ‘최종해결’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아돌프 아이히만도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이 진행 중이던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 이후 15년간 아르헨티나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가족들과 함께 숨어 지내고 있었지만, 오랜 추적 끝에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붙잡아 이스라엘로 납치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1일,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에 그를 세웠다. 아이히만에게 적용된 혐의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반인도적 범죄, 불법조직 가담죄 등 15가지였다.


《오퍼레이션 피날레》 전시 전경.

독일 뮌헨의 이집트박물관에서 예상하지 못한 전시를 만났다.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인 모사드와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유대인 박물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Maltz 박물관의 공동 기획한 《오퍼레이션 피날레》라는 제목의 전범 나치를 다룬 전시였다. (이집트 박물관에서 다루기에는 다소 엉뚱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전시 제목은 아돌프 아이히만을 추적한 모사드의 해외작전명에서 따온 것으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와 나치, 그리고 그의 체포 과정, 기소된 혐의에 대한 내용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다루고 있다. 다양한 문서를 포함한 영상과 사진, 전시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아이히만의 재판을 현장에서 참관하는 것처럼 재현한 3 채널 영상 설치 전시가 이상적이었다.


3 채널로 구성된 《오퍼레이션 피날레》 영상 설치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은 그에 대한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하여 아이히만은 방탄유리 부스 안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전시에서도 그 유리부스가 재현되었다. 3개 채널 영상은 가운데 방탄유리 부스 속 아이히만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공개 증언과 학살 관련 영상이 교차되어 보여진다. 생존자들은 증언을 하다 실신을 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반면, 아이히만은 표정 변화가 없다. 생존자들의 울부짖는 증언과 수천구의 시신을 구덩이에 불도저로 밀어 넣는 영상에도 그의 표정에는 반성의 기미조차 찾을 수 없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961년 12월 15일, 재판부는 아이히만의 15개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려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변호사가 항소를 제기했지만, 이스라엘 대법원은 기각했다. 1962년 5월 31일 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지중해 먼바다에 뿌려졌고, 그곳에서 천천히 파도 아래로 사라졌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여러모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왔지만, 전시에서는 이러한 부분은 거의 다루지 않아 아쉬웠다. 이제 막 나라를 건국한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주요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고 유대인 학살에 대한 범죄의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우겠다고 천명하며 재판 과정을 전 세계가 볼 수 있도록 재판 상황을 공개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 100명이 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출석하여 증언을 했는데, 생존자들이 공개 증언한 최초의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증언들은 아이히만 개인에 대한 전범이라기보다 나치 전체의 전범에 대한 증언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아이히만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언은 10여 건뿐이었다. 그리고 아이히만에 대한 증인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이스라엘의 말은 공허한 외침이 되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600백만 명의 유대인뿐 아니라 집시와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포함하여 1100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는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범으로만 한정하여 진행함으로써 전 인류에 대한 반인륜적인 범죄를 유대인 민족에 대한 범죄로 축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내에서의 모사드 요원들의 아이히만 납치 행위로 인해 절차상의 범죄적 문제와 아르헨티나 정부가 문제 제기를 하며 외교적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경험했던 아렌트는 미국 언론사의 객원기자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참관했다. 이후 재판 과정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아렌트도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을 몰아가는 결정을 하고서도 반성하지 않는 아이히만을 비판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목격한 아이히만의 모습은 잔인한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고, 평범한 인물임이었다. 이 모습에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이히만의 행동은 근본적인 악이 아니라, 무사유에서 비롯된 평범함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하지만 이 책은 수많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아렌트는 유대인 사회로부터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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