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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낙인을 깨는 여성의 말하기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

by DAPLS 이혜령 Jan 31. 2025


엄마는 마치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외국인 혐오자들의 말을 따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신이 온 곳을 짚어내기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 전쟁과 분단, 미국의 점령을 겪은 뒤 미국인인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죄로 추방당했다. 엄마는 내면으로 움츠러들며 당신을 이 갈등의 장소로 다시 데려가, 자기 존재를 짓이겨 없애고 무無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옮겨 온 동네는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소위 구제되었다는 명목으로 이민자들에게 끊임없이 정신적 대가를 치르게 했던, 제국의 폭력으로 얼룩진 또 다른 장소에 불과했다. 엄마는 미국인이 된 바로 그곳에서 조현병을 앓게 되었다. p.20


『전쟁 같은 맛』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첫 번째 여성은 군자다. 그녀는 1941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기지촌에서 일하다 아이들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또 다른 여성은 이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M. 조이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2세대 디아스포라 사회학자이자 군자의 딸이다. 그는 ‘군자’로 대표되는 전후 한인 이주여성의 삶과 궤적 속에 얽힌 사회적 폭력을 연구해 왔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는 군자의 생애를 새롭게 복기하기 시작하며, 『전쟁 같은 맛』을 집필했다.


이 책은 군자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생존자, 기지촌 여성, 그리고 미국 이민자로서의 한국 여성의 생존과 정체성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군자는 떠나온 한국과 도착한 미국 어디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해 ‘전쟁신부’, ‘떠돌이 유령’이 되어야 했다. 그는 조현병과 낙인 속에서도 자녀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음식과 사랑으로 가족을 지탱했다. 이는 단순히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과 이주민, 그리고 생존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다시 정의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제공한다.

     

이 책은 단순한 개인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식민주의와 성차별적 구조, 군사적 개입 등이 어떻게 여성과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한다. 저자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사회적 낙인의 작동 방식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분석한다.


“엄마는 사회에서 물러났고, 사회는 엄마를 내버릴 수 있는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 사망 선고를 내렸다. 그것은 엄마로 하여금 인격을 상실케 하고, 모성까지 잃게 한 고정관념이었다. 정신병자가 사랑할 수 있거나 사랑받을 수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p.19


이는 조현병으로 인해 어머니가 겪은 사회적 소외와 낙인을 보여준다. 정신질환은 단지 개인적 문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낙인은 개인을 비인간화하며, 특히 이민자이자 여성으로서 군자가 겪은 복합적 억압의 일부로 작동했다. 군자는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이라는 공간에서 낙인과 생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갔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개인의 선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대신, 군자의 생존을 저항의 한 형태로 바라보며,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였음을 보여준다.


"그 단어(양공주)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 여자, 나한테는 영웅이니까." p.435

"여성에게 침묵과 낙인을 깨는 말하기란 언제나 두려움이 따르더라도 결국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실천이었다." p.460

저자는 여성의 목소리가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억압당했는지 논의하며, 어머니 군자의 삶과 연결 짓는다. 군자의 삶은 낙인과 편견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저자는 군자의 생애를 통해 낙인을 재정의하고,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저항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어머니의 침묵은 단순히 개인적 선택이 아닌, 식민주의와 가부장제가 강요한 결과였음을 드러낸다. 저자는 어머니를 피해자로만 보거나 다른 가족들처럼 어머니의 과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침묵을 지키길 거부했다. 침묵과 말하기의 경계에서, 군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적 서사를 넘어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 책에서 음식은 기억과 연결을 상징하는 주요 매개체로 등장하며, 이를 통해 저자와 어머니는 정체성과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한다. 음식은 군자의 삶에서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을 잇는 매개체였다. 군자는 한국인을 만나면 “낯선 곳에 온 이들을 달래기 위해 김치를 담가주었다.” 군자에게 음식은 “우리가 남겨 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행위는 잃어버린 고향과 관계를 되살리며, 소속감을 창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음식이 단순히 생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정체성과 문화적 회복의 도구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전쟁 같은 맛”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음식은 전쟁과 식민주의,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감각적으로 소환하며, 동시에 치유와 연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전쟁 같은 맛』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사회학적 분석을 넘어,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군자의 삶은 단지 고통의 연속이 아니라, 생존과 사랑, 저항으로 이어진 연대의 서사로 다시 쓰였다. 이 책은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집단적 기억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렬한 작품이다. ‘전쟁 같은 맛’은 군자의 삶을 상징하며, 동시에 우리의 역사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p.165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김치를 담가주었다.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 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당신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엄마는 이들이 잃어버렸거나 이들에게서 지워진 한국의 친족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토록 섬세한 방법으로 엄마는 미국 가정과 미국이라는 국가가 우리의 구세주이고 우리가 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담론에 구멍을 냈다.
나는 엄마가 저항의 의도로 김치를 담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행동에는 엄마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엄마는 이를 통해 살인적인 상황에 맞부딪치며 살아내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p.266
"식민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침묵당해서,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 목소리가 얼마만큼 가치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p.275
그 시절 탈식민주의 학자들이 주장했듯, 제국은 글쓰기로 역습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 피식민자, 억압받는 자라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엄마가 직면했던 부정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 다수를 보았지만, 여전히 엄마가 한국에서 보냈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엄마가 전쟁통에서 살아남았고, 일종의 서비스업에 몸담았으며,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p.327
순전히 생존을 위한 성 노동이라 해도,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권력 구조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생존은 저항을 위한 행동일 수 있지만, 제국주의 질서하에 저항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선택으로 성매매 여성이 된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강제로 아니면 자유롭게, 이는 잘못된 이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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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조 지음 | 글항아리, 2023[2021]
사회학 | 463쪽
 #여성 #디아스포라 #트라우마    

책계정 | @boi_w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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