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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May 11. 2022

저한테 화난 거에요

  많이 부끄럽지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3월부터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 두달 밖에 안지났는데 한 것도 없으면서 짜증만 엄청 냈다.

맡은 프로그램은 대부분 어르신들이 이용한다. 그동안 아동 청소년이나 그들의 양육자들을 주로 만나다보니, 어르신들은 익숙치 않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을 체감하며 정중한 호기심으로 대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어르신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분들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이 정말 내게 있다. 지금도 오신 김에 즐겁게 신나게 잘 놀다 가셨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정말 크다. 그런데 그 마음이 내 귀찮음보다 크지는 않았나 보다. 구석에 박혀 있는 나를 로비에서부터 크게 부르시며 담당자를 찾을 때면 한숨부터 나왔다. 분명 말씀드렸고 처리해드렸는데도 계속 말씀하시는 것도 짜증이 났다. 내 성질 더러운 거 나도 알기에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귀찮음 베이스의 짜증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하시는 반말, 뜬금없는 커피 심부름, 똑같은 건으로 계속 사무실 방문하는 것이 싫었다. 부끄럽지만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도 싸가지 없게 지랄을 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는 속담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르신이 불편한 건, 나는 정말 좋은 의도로 해드릴려고 말한 건데 자꾸 의도를 의심하시거나,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언제 되냐며 재촉하시거나 등이다. 좋게 말씀드릴려고 하다가도 자꾸 반복되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르신, 저 진짜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언제까지 해드릴게요", "아 어르신 제발요!", "아 어르신 저도 바빠요 진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저 진짜 정신 없어요"란 말을 서슴없이 해버린다. "제가 연락드릴테니까 똑같은 건으로 오실 거면 사무실에 오지마세요. 도대체 몇 번째에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 분은 같은 건으로 10번 이상 오신 분이다.) 설명을 드렸는데도 계속 오시니까, 나도 짜증이 났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됐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전 직장에서는 이런 적이 없어서 짜증 내가 더 싫어졌다.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아이들과 어르신 염색 프로그램을 할 때도 짜증낸 적 없었는데....)


  내가 어르신들을 주로 만나게 됐다는 말에 우리 할머니는 남의 할머니라 생각하지 말고 한 분 한 분 자신이라 생각하라며 친절하게 대하라고 잔소리 하신다. 엄마도 혹여 어르신들한테 내가 미움 받을까 성질 대로 하지 말고 예쁘게 말하라고 하신다. 다행히 이런 내 성질 머리를 찡찡거림으로 귀엽게 봐주시는 분도 계신다. (운이 좋은 건지, 담당자라서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는건지, 후자에 가까울지도)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짜증이 나는지... 하지만 할머니랑 통화를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할머니도 복지관 노래교실과 한글교실을 오랫동안 다니셨기에 이용자들의 마음을 잘 아셨다. 담당자한테 답답했던 부분들, 화가 났던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손녀가 사회복지사라 그런가 담당자가 손녀 같아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이용하는 입장에서 분명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왜 복지관에 노인들이 가는지, 복지관에서 뭘하고 싶은 건지, 복지관 담당자에게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보았다. 퇴근 길에 할머니와 통화를 여러 번 하면서 괜시리 어르신들한테 짜증낸 게 미안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분 한 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눈맞춤을 잘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멀리서라도 눈 맞추고 인사하려고 노력했다. 담당자라고 챙겨주시기도 하고, 이용하는 시간은 짧지만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지 이야기해주시기도 한다. 인생 선배로서 여유 없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못난 젊은이에게 뭐가 됐든 힘내라며 괜히 따뜻한 인사를 건네시기도 한다. 삼삼오오 일상을 나누시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 반가워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사실 어르신들한테 화가 난 건 아니다. 나한테 화가 난 거다.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말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다. 귀찮아하면서 톡 쏘는 내가 싫어서다. 말이 안통하는 분이야 가끔이다. 상대방도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르신 뿐만 아니라 비슷한 연령대라도 소통이 안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데도 어르신들을 바라볼 때 '노인'이라는 틀에 너무 가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어르신들도 각각의 특성이 있기에 주시는 의견들을 소중히 대하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 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한 마음을 어르신들 탓으로 돌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더 돌아보고 싶었다. 평생학습사업을 맡으면서 꼭 어르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진심이 왜곡될까봐 걱정하면서, 그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태도를 돌아보지 못했다. 나도 몰랐던 나의 태도가 오히려 내 진심을 가리고 있지 않았을까.    


 "말 안해도 알지?" "내 마음 알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전에 아이들을 만날 때, "화가 나는 게 있다면 말로 표현해줄래? 그렇게 울기만 하면 선생님이 모르잖아."라고 말하던 게 떠오른다. 어쩌면 어르신들에게 나는 말 하지 않고 우는 것 대신에 짜증으로 표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르신이니까 살아온 시간이 있으시니까 거쳐온 담당자들이 많았을테니까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가 무의식에 조금이라도 있었던 거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평생교육 제도나 담당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아직 깊게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잘 모르기도 하고 말하기도 조심스럽다. 다만, 어르신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 1 억지로 친한 척하지 않을 것, 2. 차분하고 정중하게 대할 것, 3. 반존대하는 습관 고칠 것. 이 세 가지는 꼭 지킬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다, ) 더불어, 1. 신속한 응답, 2. 요청에 반응하는 태도, 3. 정중한 태도, 4.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 5. 답변하는 태도 및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만약 갑자기 정말 화가 난다고 하면, 한 번 숨을 크게 내 쉬어보고, 정말 화낼 만한 일인지 먼저 생각한 다음, 혹여 내가 과잉반응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자기 비하를 포장하는 과한 겸손도, 남 탓도, 쓸데 없이 오해사기 싫어 장황하게 말하는 것도 어르신보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어르신들의 말에 과민반응하고 화가 난 것이다. 언제나 오해 받을 수 있고 나도 오해 수 있다. 진심이 왜곡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제라도 열심히 정중한 호기심을 가지고, 때와 장소에 맞는 예쁜 말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지난 주,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이 사회복지사는 자신을 치유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아이들을 만날 때는 내 어린 시절을 볼 수 있었고, 지금은 내 현재와 미래를 보게 된다. "담당자로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과정 중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아가는 시간이길 바란다"는 상사의 말에 힘을 얻으며, 성질머리 더러운 담당자를 그래도 나름 예쁘게 봐주시는 어르신들과 내일도 신나게 복지관에서 하루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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