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다인 Oct 26. 2024

첫만남 by. 가영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날도 이상한 꿈을 꿨다. 종군기자가 된 나는 전쟁터에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멀리서 포탄이 날아오고 엎드려! 하는 소리와 동시에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아기가 깼다. 새벽 5시 반. 화장실은 현실에서 더 절실했지만 칭얼대며 엄마를 찾는 아기를 안아주는게 우선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데웠다. 그리고 곧바로 커피머신을 켰다. 커피머신아, 어서 빨리 커피를 내려줘. 빨대컵으로 우유를 쪽쪽 들이키는 아기가 눈앞에 있지만 여전히 포탄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어떻게든 견뎌보자. 몇 시간 지나면 아기의 오전 낮잠이 시작될 것이고 나는 곧 다시 잘 수 있을 것이다.     


아기는 평소처럼 잠이 들었다. 다시 아기가 깼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정오가 훌쩍 지나있다. 늘 켜두는 라디오에선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Ma mere l’oy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에 낮잠을 두 번 자는 아기를 세 시간이나 재워도 되는 걸까. 뭔가 잘못한 것같은 기분으로 아기가 먹을 점심을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에 까치집을 지어놓고 오물오물 완두콩을 집어 먹는 아기의 귀여운 모습. 아이구 잘 먹네. 비로소 창밖의 하늘을 볼 여유가 생겼다.     


코발트빛 하늘이 참 예뻤다. 그래. 오늘은 꼭 나가는 거야. 나를 위해서. 아니 너와 나를 위해서. 요리조리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기를 얼르고 달래서 씻기고 입히고 유모차에 태우는 데만 30분. 현재 온도, 미세먼지, 자외선 지수. 그냥 편하게 집에 있고 싶은 나의 뇌는 집에 있어야 할 이유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바람이 너무 좋지 않나. 나가자. 나가야 한다.      


공원에 도착하자 분수대의 시원한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여름 같은 오월의 끝자락. 봄날이 가고 있었다. 쟤들은 뭘 하고 있는거지? 공원 가운데 여덟 아홉살 쯤 된 남자아이 둘이 바닥에 앉아 가만히 분수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일광욕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운 그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남자 아이들은 보통 열심히 물장구치고 뛰어다니기 마련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걸까 괜히 궁금했다. 너도 언젠가 동네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살피는 14개월 아들을 바라보며 공원 한켠에 유모차를 세웠다.     


친구라는 말

돌이 지났지만 걸음마를 할 생각이 없는 아기에게 신발을 신기고 친정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설 수는 있는데 걸음마는 아직이야"

"아직도?"


걷기, 말하기, 모든 게 빨랐던 나를 키웠던 엄마에겐 ‘아직도’일 수밖에 없다.    

 

"몰라. 아직은 기어다니는 게 좋은가 봐. 잡고는 잘 걷는데."

"자꾸 걷게 해봐. 그 공원엔 또래 아기들 없나?"

"어… 저쪽에 걸음마보조기 미는 아기 한 명 보이긴 하네. 우리 단우처럼 아직 못걷나봐."

"단우랑 비슷한갑다. 말 걸어봐. 친구하면 되겠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엄마 친구의 자녀를 소개할 때처럼 말했다. 친구? 아기 엄마랑 친구가 되라는 것인지, 아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란 것인지, 아님 둘다인지 모를 말이었다. 친구가 뭐 그리 쉽게 되나. 요즘 젊은 사람들 아무랑 말 섞기 싫어해.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마음 한 켠에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볼까."



첫만남 

그녀를 처음 본 곳은 공원 앞 횡단보도에서였다. 오후 세 시의 볕이 꽤나 뜨거워지고 있었다. 길을 건너자마자 유모차의 차양막을 내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유모차 하나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 다른 유모차도 더 쉽게 눈에 들어오는 법. 저분도 공원으로 가는건가. 아니야, 공원 옆 아파트로 가는 걸지도. 그러나 조금 후 그녀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걸음마 보조기를 밀며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함께.     

엄마와 영상통화를 끊고 조금 후 그녀와 아기가 걸음마 보조기를 밀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아들보다 체구가 약간 더 작은 혼혈 아기였다.      


"단우야, 저기 친구있네? 어머나, 예뻐라. 안녕!"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어느새 ‘친구’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안-녕! 몇 개월이에요?"


그녀가 인사했다. 몇 개월이에요? 로 시작되는 흔한 인사. 그러나 오렌지빛 메리골드가 가득 피어있는 바닷가가 연상되는, 드물게 쨍한 미소.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공원이나 쇼핑몰에서 마주치는 여느 아기 엄마들과는 결이 조금 다른, 어딘지 이국적이면서도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아기가 혼혈인 것을 떠나 그녀 자체로 느껴지는 에너지가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내 머릿속은 그녀가 가진 ‘다름’을 설명할 단어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한편 몸으로는, 몇걸음 뒤뚱거리다 곧바로 품에 안기려는 아기를 요정처럼 작은 얼굴로 요리조리 걷는 그녀의 아기와 만나게 하려 애썼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어긋나고 다가가기를 반복하며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우리가 서로 비슷한 점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좀처럼 몸무게가 늘지 않는 잘 안먹는 아기를 키우느라 용을 쓰고 있었고, 돌이 지나도 걷지 않는 아기를 연습시키려 나왔다는 점. 또 아기의 기질이나 성향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녀의 분위기에 이끌려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더 다가갈 용기는 없었던 나는 그녀 바로 옆이 아닌 조금 떨어진 벤치로 유모차를 옮기고 아기에게 우유를 먹였다. 왜 이렇게 소심해졌을까. 전엔 안그랬는데. 쪼그라든 자신이 괜히 싫은 찰나, 원형 테이블이 딸린 벤치에서 신문을 보던 어르신이 내게 손짓했다.  

    

"거기 애기엄마, 여기 와서 앉아."


갑작스런 배려에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옮기자 그녀가 좀 더 잘 보였다. 아기에게 물을 주려는 듯 보였다. 이대로 대화가 끝나나 싶을 때쯤 그녀가 유모차를 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같이 앉아도 되죠?"

"아. 그럼요."


어디 사세요? 이유식 뭐 먹이세요? 파도를 타는 능숙한 서퍼처럼 그녀가 질문해왔다. 그렇게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는 첫아이의 엄마로서 아기를 키우는 고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연락처 교환할까요?"

"좋아요. 좋아요."


오아시스같은 그 말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라도 하는 듯 나는 얼른 휴대폰을 내밀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하긴 뭔들 오랜만이 아니었을까.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임신, 출산, 조리원, 아기가 돌 지난 무렵까지도 별다른 인연을 만들지 못했던 나였다. 우리는 같이 공원을 나와 각자의 집 중간에서 헤어졌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기분좋은 여운으로 가득했다.      


"단우야, 우리 친구 생겼네 그치?"


친구. 아기와 나, 우리의 친구였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결핍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동네친구가 필요했다는 것. 집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만날 수 있는 누군가.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동안 동네에서 마주친 아기 엄마에게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다음이 없었을 뿐.      


집으로 돌아오니 그녀로부터 카톡이 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자연’이라 소개했다. 그녀가 가진 분위기와 딱 맞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이름이 뭐에요? 공원에서부터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던 아니 묻지 못했던 내게 먼저 인사와 소개를 건내준 그녀가 고마웠다. 단지 누구엄마, 무슨맘 이라고 저장하고 싶지 않았던 내마음을 그녀가 알았을까. 반갑고 설레이는 마음이 새벽별처럼 빛났다. 자연, 그리고 자연이 낳은 바다*, 미엘이로부터.



 *바다는 미엘이의 태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