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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Oct 26. 2024

꺼져버린 스위치 by.가영

 그날은 초여름이지만 가을처럼 선선한 공기를 머금은 아침이었습니다. 산책 준비를 하던 중 자연씨가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을 보고 “와. 단우야, 하늘 좀 봐. 얼른 나가자.”하고 서둘러 나왔죠.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다 키 큰 나무들이 산책로처럼 이어져 있는 C아파트 단지를 통해 하모니마트가 있는 상가 쪽으로 향했습니다.     

오전에 유모차를 끌고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딘가로 향하는 여성들을 보게 됩니다. 한 장소에서 만나 같이 참관 수업에 가는 엄마들일까요. 다들 잘 차려입고 화장도 하셨는데 약간 들떠 보이는 그 모습에 저까지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예전엔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모습인데 이제는 ‘나도 언젠간 저 무리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무리 지어 다니는 것보단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하는 저이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제가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자연씨처럼 옷을 뒤집어 입고 나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자연씨의 이야기가 애석하면서도 반가웠네요. 저는 바지였어요. 자연씨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춤에 달린 라벨을 살랑이며 유모차를 밀고 다녔을겁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거예요. 부끄러움은 타인의 몫이 되어버린 그런 날이 저에게도 있었네요.     


엄마가 된 이후로 낯선 자신을 자주 만나곤 합니다. 아기가 묻힌 음식 자국들로 얼룩진 티셔츠를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나. 뒤늦게 엄청 더럽다는 걸 깨닫고도 ‘어차피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는데 뭐.’라고 말하는 나. “여기 금연 구역인데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갑자기 너무 당차게 하는 나. 9시 뉴스에서 분유를 훔치다 붙잡힌 생후 2개월 아기 엄마의 보도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까지... 앞으로 또 얼마나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될지 기대 반 두려움 반입니다.      


자연씨가 얘기한 것처럼 엄마가 된 이후로 잘 보이지 않는 영역과 아주 잘 보이는 영역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나’라는 집에 켜져 있던 스위치는 아주 최소한의 것만 남겨지고, 대신 나한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아기와 그 주변으로 스폿 조명이 켜진 듯이 말입니다. 예전의 내 모습을 담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좋아하고 자주 했던 것, 자주 먹었던 것, 자주 가던 곳들. 나의 일부이자 패턴을 이루고 있었던 많은 것들은 불 꺼진 방안의 책들처럼 먼지가 쌓여갑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그냥 받아들여야 할지(‘원래 그런거야.’라고 다들 그러니까요.), 어둠 속을 더듬어 다시 ‘나’를 이루던 그 스위치들을 찾아 켜야 할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제 나는 엄마라는 역할에 밀려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데 ‘원래 다 그런거’라 생각하니 너무 우울했어요. ‘그냥’ 이라던가 ‘원래’라는 단어 뒤에 따라오는 말을 잘 못 받아들이는 성향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원래 그런 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다시 나를 찾는 작업에 대한 고민이 더해졌어요.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어서 맨날 굶는데 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가져야 하나. 매일 피로에 쩔어 있는데 뭔가를 할 체력은 어디서 보충하나. 내가 다시 일할 수는 있을까? 아기를 맡기고? 그럼 언제가 적당할까? 그런 생각이 매일 밤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죠. 남편과도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보았지만 뚜렷한 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별생각 없이 본 <베이비스, 눈부신 첫 해>라는 다큐멘터리가 답을 내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가 걷는 순간까지 아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과학 다큐에요. 아기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이미 봤던 다큐였는데 그땐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서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들이 많았습니다. 다큐를 다시 보던 중 속으로 ‘역시!’ 라고 외쳤던 부분이 있었어요. 엄마가 되면 뇌가 다르게 기능한다는 내용이었죠.      


그 다큐에 따르면 여성이 출산하게 되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급증하면서 뇌의 편도체(amygdala)라는 원시적 기관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편도체는 공포, 불안 같은 감정에 몸이 반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기관이 활성화되면 엄마는 경계태세를 갖추고 아기를 걱정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중요한 사실은 일단 엄마의 편도체가 열리면 아이가 몇 살이 되든 ‘평생’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에요. 아기 보느라 우리 몸 어딘가가 멍들어 있어도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기억조차 나지않는 그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죠.

마트에서 분유를 훔치던 뉴스 속의 여성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 여성은 자신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지금 아기가 굶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겠죠. (다시 뉴스를 찾아보니 ‘생후 2개월 아기가 10시간 굶어...’ 라네요. 2개월 아기의 수유텀을 떠올려보면. 하...)     

 

‘평생’이라는 단어. 저는 그 단어에 압도되었습니다.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일어나는 생물학적 반응이라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요. 이제 ‘아이’라는 스위치가 켜진 상태에서 나를 찾는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로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주변에선 ‘아기가 좀 더 크면’이라는 전제를 붙이더라고요. 궁금했어요. 얼마나 더 크면? 걸으면? 말을 하면? 두 돌쯤? 세 돌쯤? 그런데 생각보다 조급할 필요가 없었어요. 아기는 생각보다 더 빨리 자라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도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 때가 올 텐데(물론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요) 고민하느라 아기의 예쁜 시절을 놓쳐 버리면 안 되겠다 싶었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창밖을 보며 옹알이하는 아기에게 뭐라고 중얼중얼 말해주다 갑자기 탁! 하고 스위치가 켜졌어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켜지는 바로 그 스위치, 영감(Inspiration)이라는 스위치였죠.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저는 아기가 혼자 노는 틈을 타 떠오른 생각을 정신없이 옮겨적었습니다. 자연씨가 말한 영화 속 ‘패터슨’처럼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는 없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메모지에 마구 휘갈겨 적었죠. 아직 날 것인 그대로 제 책상에 놓여 있지만 조만간 더 발전시켜봐야지 하는 기대감도 함께 생겨났습니다.     


그날을 시작으로 나를 찾는 작업은 틈틈이 계속되었습니다. 또 마침 아주 근사한 타이밍에 자연씨가 “우리 같이 글을 써보면 어때요?” 하고 말해줘서 그날부로 더 많은 스위치가 켜지고 있답니다. 아마 자연씨도 그렇겠죠. 지나가는 풀꽃, 바람,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 서로의 글들을 통해서요.


           

반짝반짝 

더 빛날 우리 모습을 상상하며.     

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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