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의 첫 서간문의 주제인 ‘엄마가 되니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할 말이 있어요. 어제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저녁 8시쯤, 미엘을 재워서 눕힌 뒤 컴컴한 방 안에서 후다닥 티셔츠를 갈아입고 저녁으로 먹을 빵과 다음날 미엘에게 요리해 줄 브로컬리를 사기 위해 나갔어요. 하모니마트에서 브로컬리를 사고 근처에 있는 파리바게트에 들어갔는데 주말 저녁이었잖아요. 예상대로 매대는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냥 돌아가긴 아쉬워서 한 정거장 떨어진 다른 매장을 향해 걸었어요. 오랜만에 바람이 시원한 여름밤이었죠. 손에 든 브로컬리를 기분좋게 흔들며 걷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멈췄어요. 입고 있는 노란 티셔츠를 살펴봤는데 왼쪽 가슴에 있어야 할 콤마모양의 로고가 보이지 않는거에요. 언니, 전 어제 옷을 뒤집어입은채로 저녁이지만 대낮처럼 불이 환하게 켜진 마트에서 장도 보고 파리바게트 매장을 두 곳이나 다녀왔답니다. 뒷덜미로는 라벨을 뽐내고 옆구리로는 기다란 택을 휘날리면서요.
이 이야기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다행히 원하던 빵을 찾아서 저녁을 굶지 않았다는 것과, 엄마가 되니 보이는 것들보단 어쩐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싹 씻기고 가장 깨끗하고 예쁜 옷을 입혀서 데리고 나가면서 제 차림새가 어떤지는 보이지않는거에요. 뭐 그 사실이 특별히 슬프거나 하진 않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거든요. (물론 옷을 뒤집어 입고 외출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가 되고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의 대부분은 저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시무룩해지긴 합니다. 입이 짧은 아기를 한 스푼이라도 더 먹여보려고 사투를 벌이고 난장판이 된 식탁과 바닥을 치우고 나면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두시인데도 식욕이 생기지 않아 점심을 건너뛸 때가 많아요. 아기를 위해서는 유기농 재료와 좋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열심히 검색해서 사들이면서 제 영양제를 주문하는 건 뒷전이구요. 무엇보다 각종 육아서와 당장 쓰지 않는 육아용품, 뜯지도 않은 택배상자 등에 점령당한 저의 책상은.. 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못 본 척 하고 있는 것이긴 합니다. 얼마전엔 미엘이 제 다리를 잡고 흔들흔들 숨바꼭질을 하며 즐겁게 노는 영상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더니 동생이 한 마디 했어요.
“무릎은 왜 해먹었어”
뭔 소리인가 하고 살펴보니 제 양쪽 무릎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푸르죽죽한 멍이 하나씩 들어있더라구요. 영상 속을 가득 채운 사랑스러운 아기의 얼굴 뒤로 아웃포커스 된 저의 작은 생채기를 알아보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입니다. 출산 이후 제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주는 사람이에요. 네 살 터울인 제 여동생에게 느끼는 고마움에 대해서 쓰자면 너무 길고 찐득한 글이 될 것 같아 다음에 다시 한 번 자랑인 듯 자랑아닌 듯 자연스럽게 등장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엄마가 되니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 영화 <패터슨>을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랍니다.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은 ‘패터슨’이라는 남자는 ‘패터슨’이라는 동네에 사는 버스기사에요. 영화는 그의 일주일을 잔잔하게 낭독하듯 보여줘요. 갑자기 이 영화를 등장시킨 이유는 패터슨의 아내가 쌍둥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하자 출근길 퇴근길 할 것 없이 가는 곳 마다 그의 눈에는 유독 쌍둥이들이 들어오는 장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예요. 딱 그런 느낌으로 저도 미엘을 낳고나니 길거리에 다니는 유모차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기에게도 물론 눈길이 가지만 제 시선은 유모차를 끌고 있는 여성이나 남성에게 더 오래 머뭅니다. 기회가 될 땐 그들의 표정을 관찰해보기도 합니다. 늦은 오후 유모차를 끌면서 여름의 나무들처럼 에너지를 뿜어내거나 솟아오르는 흥을 주체하기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드물죠. 그렇다고해서 지하철에서 흔히 보는 출퇴근길의 직장인들처럼 무료해보이거나 고단해보이지만은 않아요. 어떤 종류의 사려깊음과 생기, 그리고 단단함이 느껴지거든요.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유모차 안의 아기를 확인하는 몸짓에서,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힘차게 유모차를 밀면서 걷거나 경사면이 없는 곳에서도 멈칫하지 않고 숙련된 드라이버처럼 유모차를 부드럽게 돌려 턱을 넘는 동작 등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면 꼭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어져요. 제가 단우와 함께 있던 언니에게 그랬듯이요.
언니, 사실 전 돌이 가까워져서야 아기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거의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신생아 시절 육아로 인한 번아웃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땐 친정엄마에게 전화해서는 이렇게 외쳤어요. “쿠팡으로 시킨거였으면 이미 반품했고 직장이었으면 벌써 때려쳤어!” 가장 지치고 미쳐버릴 것 같았던 어떤 여름날, 툭 치면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으로 유모차를 끌고 공원을 돌면서 보이는 모든 엄마들을 붙잡고 묻고 싶었어요. 당신도 나만큼 힘들거나 힘들었는지, 괜찮은건지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건지, 아기가 이만큼 크면 좀 쉬워지는건지, 도대체 언제쯤 아무거나 먹여도 되고 말도 통하는 건지, 지금의 이 힘든 시기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걱정 없는 육아를 하는 날이 오긴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특히 돌이 지나서 아장거리며 걸어다니는 아기와 함께 있는 엄마를 보면 어찌나 부럽고 저에겐 왜 그렇게 아득한 미래 같아보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벌써 계절이 몇 차례 바뀌더니 초록이 무성한 여름이 돌아왔고, 전 그때와 같은 나무 아래에서 돌이 지난 저의 아기의 걸음마를 연습시키고 있네요. 조금 더 단련된 체력과 제법 튼튼해진 팔뚝과 훨씬 넉넉하고 너그러워진 마음으로요. 그땐 힘들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에서야 보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되어보니 세상 모든 작고 연약하고 무해한 것들에 조금 더 애틋해집니다. 참새나 고양이, 들꽃, 갓 돋아난 연한 이파리 같은 것들을 보면 몽글몽글해지며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들어요. 거친 레이어가 한꺼풀 벗겨진 무방비 상태의 속살에 직접 닿는듯해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습니다. 언니는 이런 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런 찰나의 마음들을 이리 저리 끌어당겨 기록하다보면 시가 되고 편지가 되고 수필이 되지 않나요? 혹시 영화 <패터슨>을 아직 보시지 않았다면 언젠가 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극 중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쓰거든요. 버스 운전석에서도 쓰고, 자신의 책상에서도 쓰고, 점심을 먹다가도 써요. 그의 일상은 엇비슷하고 단조로운 듯 하지만 운율처럼 빛나는 뭔가가 항상 있어요.
우리의 매일의 사소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상의 근사한 운율이니까요. 언니와 단우를 만나서 참 좋아요.
2024.7.4
언니의 운율, 자연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