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메모앱으로 틈틈이 글을 쓰셨을 것 같은 가영언니,
어제는 서울 친구네 신혼집에 놀러가서 낮부터 하이볼에 취해 신나게 수다를 떨다왔습니다. 그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침대 사이즈만한 거대한 소파였어요. “이건 자극적인 도심의 맛이야”하고 칭송하면서 배달 음식을 배 터지게 먹은 뒤 여자 넷이 얼기설기 소파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며 한량처럼 뒹굴거리는 맛이 그만이더라구요. 미엘을 낳은 이후로 주변에 육아하는 다른 집에는 가끔 가봤어도 신혼집에 놀러간건 처음이었습니다. 아기 장난감이 널부러져있지 않은 거실은 깔끔하고 쾌적하면서도 조금 생경한 느낌이었어요. 저녁 여섯시가 넘어서야 아쉬워하며 주섬주섬 일어나 긴 1호선 여행 끝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놀이매트가 펼쳐져 있는 익숙한 거실의 풍경에 현실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남편은 아기를 재우는 중이었고 오븐에서는 저녁으로 먹을 따끈한 무사카가 구워지고 있었어요. 와인 한 잔과 함께 든든히 배를 채우고 잠에 들었습니다. 완벽한 자유부인의 날이었죠.
아침에 일어나니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더라구요.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보셨다면 공감하실거에요. 타임 루프에 갇힌 주인공이 같은 시간대를 끊임없이 반복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설거지더미를 마주할때마다 그 영화가 생각나요. 분명히 설거지를 싹 했는데 돌아서고나면 다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신박한 나날들의 반복입니다. 특히 멕시코에서 시언니가 온 이후로부터는 다같이 신나게 해먹고 난장판을 만들고 열심히 치우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네요. 전날 열심히 놀다 왔으니 찍소리 않고 주방을 치우고 다같이 먹을 아침식사도 준비하고 미엘의 반찬도 세 개나 만들었답니다. 먹이고 치우기를 세 번, 산책 두 번을 하니 하루가 다 갔네요.
그러고나니 이제 밤, 드디어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 조금 생겼습니다. 요즘은 글을 쓸 때 음악을 잘 틀지 않습니다. 고요함 속에 들리는 타자 치는 소리가 좋거든요. 그렇지만 오늘은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재생했습니다. “언니를 울게 만들었던 그 음악을 이따가 미엘이 자면 들어봐야겠어요”라고 하니 언니가 링크를 보내주셨죠. 슈베르트냐 모차르트냐 한다면 저는 슈베르트입니다. 첫 음절부터 편안하네요. 가만히 말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제 어깨를 어루만지며 토닥여주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이 곡을 들으며 이불의 얼굴을 파묻고 우는 언니의 어깨와 그런 언니를 쓰다듬는 단우의 조그만 손과 작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상상해봅니다.
언니, 스페인어로는 ‘출산하다’라는 말을 ‘dar a luz’라고 한대요. dar는 주다(give)라는 동사이고 luz는 빛(ligh)이니 ‘dar a luz’는 빛을 주다라는 뜻이 되죠. ‘다르 아 루즈’라고 가만히 발음해보면 혀 가운데에 작고 소중한 구슬 하나를 올려두고 떨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굴리며 말하는 느낌이 듭니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임신 기간 동안 하루에도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이었어요. 언니의 서신을 읽으며 오랜만에 다시 이 표현을 떠올렸습니다. 아기와 함께한지 어느덧 15개월, “dar a luz” 하고 되뇌어보니 제가 아기에게 세상의 빛을 준다고 생각했던 예전과는 또 다른 이미지가 그려지네요. 바로 제 앞에서 햇살처럼 빛나는 얼굴로 웃고 있는 아기의 얼굴입니다. 그날 아침의 단우도 언니의 눈에 그렇게 빛나는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친정 어머니의 눈에 담긴 언니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엄마’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으셨죠. 전 아직도 친정 엄마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걸 보니 아직도 누군가의 엄마이기보단 딸이고 싶은가봅니다. 미엘이 잘 먹지 않고 밤잠도 자주 깨던 몇 달 전, 저도 덩달아 밥맛이 없어져 식사도 불규칙하게 하고 수면부족이 누적되다보니 체중이 줄더라구요. 그때 저희 집에 오셨던 엄마가 미엘에게 “우리 딸 고생시키지 마”라고 하시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오랜만에 저희 집에 오시면 손자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으실 텐데도 손수 만드신 반찬을 냉장고와 냉동실에 가득 채워주시고 시큰거리는 손목으로 부지런히 설거지를 마치시고 집안일을 구석구석 돌보시고 나서야 “미엘아” 하며 앉으십니다. 저도 미엘에게 저희 엄마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엄마의 반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아기를 낳고나서도 한동안은 ‘엄마’라는 말이 어색했어요. 하루 종일 노력해야 엄마 흉내라도 간신히 내는 마당에 아기 앞에서 저 자신을 엄마라고 지칭할때마다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엄마 노릇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는지 이제는 미엘이 어여쁜 목소리로 저를 마마! 마마! 하며 불러주네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엄마’라는 말. 글을 마무리지으며 혼자 괜히 ‘엄마’ 하고 작게 소리내어 발음해봅니다. 평생 불러왔고 앞으로 평생 들을 흔하디 흔한 두 음절짜리 단어에 왜 이렇게 속절없이 코가 매워지고 눈물이 고이는 걸까요? 내일은 아침 일찍 엄마에게 전화해서 괜히 틱틱대보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장마를 지나며,
자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