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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작가 Jun 15. 2024

엄마가 많이 바뀌면 일어나는 일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나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다. 큰 실패를 겪거나 생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자책을 한다는 것이다.


오은영 선생님이 예능에 나와서 했던 말 중에 트라우마에 대한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 얘기처럼 들릴 때가 꽤 있었다.

아마도 과거의 트라우마와 연관이 있는 같아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돌아가시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번째 새엄마가 생겼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경계하고 벌써 새엄마가 생긴다는 게 어린 나이로써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친절하고 상냥한 그 아줌마의 분위기 덕분에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그래도 그분 또한 남편을 사별로 떠나보내셨기에 

그분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이제 막 아줌마를 새엄마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아줌마를 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께 그분의 근황을 여쭤보고는 했지만 아버지는 물어보지 말라는 대답으로 일관하셨다.

그렇게 첫 번째 새엄마를 잃었다.


그 뒤로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이우라는 지역에 사는 부자 아줌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중국 아줌마의 집 바닥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대리석 바닥이었고, 집안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녔다.

물은 큼지막한 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섞어서 써야 됐는데, 나는 그게 참 불편해서 싫었다.


말도 하나 안 통하는 두 형들과 처음 보는 중국인 아줌마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모든 것들이 낯설고 무서워서 동생과 나는 서로 많이 의지했었다. 그러다 중국의 명절날 근처에서 요란한 파티를 하고 심지어 창문 앞에서 폭탄 같은 폭죽이 터지는 우리는 그분의 가족들이 사는 대저택 같은 4층 집에 방문했다.


그 동네는 모든 집이 4층 짜리였다. 한 집에 대략 6~7명 정도가 같이 사는 듯했다. 

중국식 테이블에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중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형들과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성이 오가면서 아버지가 굉장히 화가 나신 모습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오셨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지? 겨를도 없이 묵던 집에 돌아가 짐을 챙기고 그대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갔다. 그렇게 두 번째 새엄마도 떠났다.


이후 우리는 상해를 거쳐 대련에 터를 잡았다. 어떤 한 한인 민박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배가 고픈 우리에게 저녁으로 가져다 주신 음식이 KFC였다. 중국의 KFC는 조금 짰다.


며칠 뒤 대리석 바닥이 깔려있고 계단이 있는 웅장한 집에 터를 잡았다. 나는 그 집이 참 좋았다. 

시내가 바로 내려다보이고, 거실 쪽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있었는데 여름에는 그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새로운 사람을 데려오셨다. 나는 사실 지속적인 변화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빠, 이 사람도 곧 떠날 텐데 그냥 우리끼리 살면 안 될까?

아버지는 내게 이기적인 놈이라고 하면서 격렬하게 화를 내셨다. 심지어 울먹이면서..

그렇게 또 세 번째 새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사춘기 나이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동생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새엄마와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그분도 그때는 20대 후반이었고, 나도 10대 중반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10살 남짓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누나였다.


그러나, 나는 가족으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매번 툭툭 내뱉는 아줌마의 불친절한 언어는 내게는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의무적으로 이웃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난하지 않으면 매를 맞는 고발 시스템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비난할 만한 소재를 찾는 게 생존에 유리했다고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경기장 같은 곳에 불러 모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죄인을 처참하게 사형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줌마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나라는 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갑자기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고, 우리는 도망가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줌마는 왜 오지 않느냐고 묻자, 그제야 아줌마가 탈북민이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와 같은 루트로 오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2명 정도의 아줌마들이 거쳐 갔다. 이제 어느 정도 알만큼 알게 된 나이가 되어서 더 이상 그런 관계들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힘들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털어놓을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학창 시절에 관계에 대한 불안함은 나보다 1년 먼저 대학에 들어간 1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면서 극대화되었다. 정말 너무나 아픈 이별이었다.


그 뒤로 성인이 되어 연애를 하고 자아가 형성되면서 습관적으로 내가 힘들거나 상황이 어려워질 때는 

오히려 비난받고, 상처받았던 과거들이 떠올라서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짜증 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아예 연락을 끊어버리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또 하루 이틀 정도는 미친 듯이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같이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통은 혼자 있는 시간을 길게 가지고 나면 진정된 자세로 해야 할 일을 해나가곤 했다.


문제는 보통 이별은 이럴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옆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비난과 짜증을 듣게 되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어 진다.


이런 과거의 경험들이 나를 만들어 왔지만, 이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아니 끊어낼 것이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집중하면서 건강한 관계를 맺어가기를 나는 간절히 희망한다. 그렇게 아이도 낳고 가정도 꾸려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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