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삶은 팍팍했다. 태어나보니 오빠가 넷이나 있었고, 온 집안에 쿵쿵 발망치 소리와 부연 흙먼지가 끊이지 않고 피어났다. 오빠들의 몸싸움하는 실랑이질에 걷어차여, 아궁이 앞에 넘어지게 된 것은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사람들은 천운이라 했다. 손이 이렇게 타버렸는데 얼굴이 멀쩡한 것은. 그러나 그 오그라붙은 손 때문에 그녀는 수없이 머나먼 도시에 나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허벅지 살을 떼 손바닥에 이어 붙이는 끔찍한 수술을 수차례 받았다. 수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기도삽관 때문에 목구멍이 아프고 튜브냄새가 진동을 했다. 수술 후 일주일이 넘게 깨어나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병원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입은 쓰디썼고, 오른손은 널찍한 부목을 대 건어물처럼 널어 붙여놨다. 이번에는 잘 펴지길 바랐지만, 얼마가 지나면 손은 다시금 오그라붙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그 수술을,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반복했다. 그녀는 전신이 마취되는 느낌을 끔찍이도 혐오했다.
부모님은 그녀를 아무 데도 못 나가게 했다. 병신이 집 밖을 나돌아 다니면 사람들이 볼까 부끄러워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예 집을 나가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아니, 잠 자체를 거의 안 자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 미싱사에게 따뜻한 곳에서의 잠은 사치였다. 미싱 앞에 앉아서 밥을 먹었고 소변을 누는 잠시의 시간에 반쯤 기절한 상태로 잠을 잤다. 코피를 자주 쏟아서인지 월경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못 배우고 장애를 입은 소녀를 취업시켜 주는 곳 중에 그만한 일이 없었다.
다섯째 만에 얻은 너무나 귀한 딸이어서, 불의의 사고로 다쳐버린 딸이 너무나 애틋해서, 더 이상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아껴주고 싶었던 부모님의 진심을 알게 된 것은 그녀의 환갑에 이르러서였다.
부모님의 엄격한 통제 아래 그녀는 많은 오해들을 쌓아 나갔고, 열일곱 살에 수술하고 회복 중에 있었던 일이 끝내 그녀의 자존감을 박살 냈다. 고통 속에 있는데, 그녀를 지켜본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와 그녀는 나이 차이가 열 살도 훨씬 넘었기에, 그녀는 그를 선생님(먼저 난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예의 바른 그녀를 좋게 보았던지, 그는 그녀에게 자기의 친구를 중매했다. 눈이 먼 사람이었다. 내가 꽃다운 나이에 수술에 수술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처량하고 지겨워 죽겠는데 평생 네 친구 수발을 들며 살라는 거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영민하고 재능 있고 꿈 있는 자아에 상관없이 그저 남들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그녀는 칼날 위에 선 기분이 들었다. 시골에서 도망쳤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눈 뜨면 코 베어간다는 무시무시한 서울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지 멀쩡한 남자가 자기를 좋다고 매일 기다려주니, 마음에 썩 들진 않아도 이 남자가 조금씩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전철역에 마중 나왔을까? 궁금해졌다. 그는 날마다 편지를 써 왔다. 이 점이 문학소녀였던 그녀에게 크게 어필이 되었다. 말주변은 없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결혼해 보니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물 한 잔도 스스로 떠다 먹는 법이 없었다. 생선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면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당신도 먹어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보이는 떵떵댐과 달리 밖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소심왕이었다. 남편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독해지지 않으면 나까지 세트로 무시를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상했던 남편은 집에서는 그녀의 고막이 찢어질 때까지 때렸다. 시댁에서도 남편의 입지는 작았고, 그것이 그녀는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집안의 모든 일을 장악하며 본인과 남편의 입지를 확장해 나갔다. 시어머니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온 명절을 전부다 시댁에 갈아 넣어도 괜찮았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다 오빠들 때문이다. 나를 아궁이 앞에 넘어뜨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래서 평생 오빠한테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오빠는 나보다 머리가 특별히 더 좋지도 않으면서, 남자라는 이유로 대학도 갔잖아. 그때 오빠 하숙집 수발 누가 했어? 내가 했잖아. 그러니 나는 오빠한테 항상 받아도 모자라.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딸로 자라오면서, 나는 매번 밥값을 계산하는 숙모를 보았다. 숙모는 하루종일 백화점에서 손님들 비위를 맞추며 발바닥에 불나게 종종거리고 퇴근하셔서는 엄마와 나의 앞접시에 상냥하게 고기를 구워서 얹어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밥값을 내셨다.
한 날은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는 왜 한 번도 밥을 사지 않느냐고. “오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으니까, 나는 받아도 돼”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속으로, ‘그럼 숙모는 대체 무슨 죄란 말이야. 숙모가 엄마한테 해 끼친 것도 없는데. 옛날에 아무리 그랬어도,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올케와 조카들에게 밥 한번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을 했다. 엄마는 오빠 때문에 자기가 손을 다쳤고, 그래서 이런 남자를 만나서 살고 있으니 당연한 거라고 여기시는 듯했다.
엄마의 딸이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됐다.
시집을 갔는데, 아버님은 나를 볼 때마다 “아이코오 예쁜 우리 다비” 하셨고, 어머니는 “뭐 필요한 것 없냐”를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셨다. 그게 참 감사했다. 누가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예뻐라 해주신 적이 없어서 황송하기도 했다.
‘엄마, 나 엄마 바람대로 이렇게 사랑받고 좋은 곳에 시집가게 됐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엄마의 기도 덕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에게 시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엄마가 대번에 하시는 말씀.
네 남편이 못 벌잖아. 그러니까 박여사가 해야지. 그게 뭐, 너 예뻐서 해주시는 건 줄 아니? 착각하지 마.
사람의 말에는 정말로 권세가 있다. 엄마의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에는 감사를 마르게 하는 씨앗이 뿌리를 내려버렸다. 어머님이 뭘 해 주셔도, 아버님이 어떤 말씀을 해주셔도, 감동스럽지 않게 됐다.
잘 나가는 직장 내려놓고 꽃다운 이십 대에 돈 없는 전도사한테 시집와서 순종적으로 고생하는 내가 당연히 받아 마땅한 것, 자기 아들한테 내가 잔소리 못하게 입막음하려는 값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어머님이 뭘 해주셔도 감사하지가 않아졌다. 그렇게 수년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동기가 어쨌든, 겉으로라도 나한테 잘해주시는 건 분명히 감사할 일 아닌가? 좋다 좋다 하면 좋은 거고, 밉다 밉다 하면 진짜 미워지는 법인데, 엄마는 나더러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면서 왜 내 행복을 저렇게 깨려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