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결심이 아닌 소박한 보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영화 '리빙: 어떤 인생'
또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나이도 또 한 살 먹었다. 괜히 새로운 다이어리를 꺼내 만지작 거리면서 새해 To do list를 써본다. 다른 운동을 시작해 볼까. 최근 요가처럼 정적인 운동만 했더니 수영이나 테니스 같은 좀 활동적인 게 좋겠다. 근력 운동을 위해 PT도 좀 받아 볼까. 오늘 당장에라도 운동에 나설 마음으로 급하게 찾아본다. 이거다 싶은 건 이미 예약이 끝이고 다른 건 위치나, 가격이 좀 내키지 않는다. 영어 공부도 해야만 할 것 같다. 요즘 따라 유난히 영어 공부 앱 광고가 눈에 띄더라니. 아마 며칠 정도 부지런을 떨다가 또 손을 놓을 텐데. 결제 버튼 앞에서 망설여진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본다. 뭔가 희망차야만 할 것 같고 거창한 결심도 해야만 할 것 같다. 기꺼운 마음이 드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 살 먹은 나이도 부담스럽고 새해라고 해봤자 어제에 이은 또 다른 오늘일 뿐인데 뭐가 얼마나 다를까 싶기도 하다. 전혀 새롭지 않고 새로워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새로워져야만 할 것 같은 마음속의 부담이 가득 차 있다.
새해 소망이 아닌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뒤의 To do list라면 어떨까. 뭐가 좀 달라질까. 아마 예전 삶은 버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일상이 아닌 새로운 일탈을 꿈꿀 것 같다. 어쩌면 좀 ‘뻔한’ 일탈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을 찾는다.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펑펑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겠지. 가보지 못했던 곳에 가거나, 비싸서 사지 못한 무언가를 사거나, 또 값비싼 무언가를 먹거나. 술과 환락에 취한 밤을 보내는 건 또 어떨까.
영화 ‘리빙: 어떤 인생’에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며 반복적인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아가던 시청 공무원인 주인공 윌리엄스(빌 나이)가 어느 날 자신에게 남은 인생이 불과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은 이후의 삶을 그린다. 인생 처음으로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생을 즐겨보기로 결심하고 간 바닷가 휴양지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이와 술과 노래에 취해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직장 동료였던 마거릿에게 말을 걸어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보기도 한다. 낯선 그들에게 오히려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아마 평소였다면 절대 감행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평소처럼 미뤄두고, 묵혀두었던 각종 민원서류들이 떠오르고 좀 더 적극적인 해결사가 되어보기로 자처한다.
어쩌면 새해 우리가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거창한 결심보다 일상에서의 소박한 보람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일상을 뻔하게 살면서 나머지 시간에 최소한의 일탈을 꿈꾸기보다 일상을 좀 더 힘껏 살아보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스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의 동료가 말한다. “우리가 마음먹고 최선을 다하면 훨씬 잘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에 난 사회인으로서는 좀 나대면서 살아볼까 한다. 뻔뻔함 지수는 높이고 겸손력은 좀 낮추고 우왕좌왕하더라도 앞으로 전진. 개인의 나로서는 늘 그렇듯 제철 음식 먹고, 술은 좀 줄이고, 내 좋은 사람들 자주 만나고(이래서 술을 줄일 수가 없지!), 부지런히 걷고, 많이 읽고, 다양하게 보고. 늘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