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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숙제 같은 영화를 만났을 땐 영화관이 답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by Ellie

‘라떼는!’ 손바닥만한 직사각형의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감상하는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였을까. 어느 날부터 집집마다 컬러 TV가 집에 생겼고, 얼리 어답터인 아빠 덕분에 오래지 않아 비디오테이프를 넣어서 볼 수 있는 비디오 플레이어도 들여놨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도,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셈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네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인기였다. 동네마다 있는 조그마한 가게엔 인기 작품이래 봤자 작품당 고작 비디오테에프를 한 두 개 들여놓는 게 전부였다.


옷가게를 하던 부모님이 비디오가게로 전향했던 2000년대 초반엔 짐작컨대 작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벗어나 대형화를 시도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작품당 비디오를 한 두 개만 들여놓는 게 아니라 많게는 십 수 편씩 들여놓는 식이었다. 당시엔 다이하드, 인디아나존스, 페이스오프 등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주름잡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 대여점 사장님과 친해놓으면 신작 비디오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선착순이 원칙이지만 선순위는 그야말로 사장님 마음이니까. 사장님 입장에서는 빌려가자마자 보고 빠르게 반납하는 손님이 최고다. 신뢰관계가 돈독히 쌓인 손님들에게 우선순위가 가는 것은 당연지사. 어찌 보면 그것 또한 알량한 권력이었다. ‘나한테 잘 보이면 비디오 빨리 빼줄게’라는 걸 떡밥 삼아 최대한 빨리 반납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을 테니까.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등장했고, 어느 날부터 불법 다운로드가 기승이었다. 손쉽게 음악이며 영화를 다운받아서 듣고,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범죄라는 인식은커녕 약간의 죄의식도 없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우리 모두에게 일천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비디오 대여점의 짧은 화양연화를 맛본 부모님의 비디오가게는 금세 손님이 줄었고, 얼마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넷플릭스도 비디오 대여점에서 시작했다지만 누구나 다 넷플릭스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이후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더욱 다양해지고 편리해졌다.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 받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굳이 다운로드라는 번거로운 작업조차도 필요 없어졌다. 스트리밍이라는 편리한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니까. 심지어 한 달에 만원 남짓한 돈이면 수만 편의 영화를 아무 때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대다. 마음만 먹으면 내 손 안의 영화관에서 실시간으로 무제한의 영화를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출퇴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나만의 손바닥 영화관을 통해 하루에 한두 편씩 보는 게 일상이다. 어디 그뿐이랴. 집에는 큰 TV와 빵빵한 스피커, 암막커튼을 구비해 영화관 못지않은 환경을 구비해 뒀다. 침대 머리맡에는 태블릿 PC와 이동식 TV도 있으니 그야말로 24시간 내내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 한 편을 오롯이 한 번에 즐기기가 어렵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가 앞으로 돌려볼 수도 있고, 지겨운 장면을 스킵할 수도 있고, 핸드폰 검색 등 딴짓을 할 수도 있고, 잠깐 멈춤을 한 뒤 화장실을 다녀올 수도 있다. 언제든 멈췄다가 언제고 다시 켤 수 있다.


언제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관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있지 않는 한 도무지 볼 수 없을 것 같은 영화가 있다. 러닝타임이 너무 길거나, 러닝타임은 길지 않지만 길게 느껴질 정도로 지겹거나, 매운맛의 도파민 콘텐츠에 절여진 뇌가 느끼기에 조금은 맹숭맹숭한 영화를 보거나 할 때다. 특히나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짧고 도파민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영상에 익숙한 요즘에는 러닝타임이 2시간을 넘어서는 영화는 도무지 영화관이란 공간에 갇히지 않는 이상 한 호흡으로 소화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 좀 본다는 시네필들 사이에 좋은 영화라는 소문이 자자해 늘 보고자 시도했지만 도무지 진도가 나질 않는 영화였다. 늘 초반 10분을 넘어서면 잠들거나 딴짓하거나 꺼버리기 일쑤였다. 영화는 무려 17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했다. 3시간을 꼼짝없이 영화관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내 인내심이 버텨내질 못했다. 언젠가 다시금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자발적으로 ‘갇혀’ 한 번쯤은 꼭 보고 싶은 숙제 같은 영화였다. 최근 영화 여자 주인공의 내한을 계기로 재개봉을 한 터라 볼 기회가 생겨 일찌감치 예매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연극의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호쿠가 우연히 극작가인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뒤 흘러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아내와의 평화로운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았던 가호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다 아내에게 끝내 아무런 이유를 듣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아내의 죽음 2년 후 히로시마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차를 남에게 맡기기를 꺼리던 가호쿠는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조금씩 소통하며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각자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되고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아픔도, 슬픔도, 분노도 꾹꾹 참아내기보단 쏟아내야 한다. 회피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솔직히 대면할 수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니, 그저 살아갈 수 있다.


영화는 듣던 대로 좋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끝끝내 이 영화를 온전히 한 번에 볼 수 없었을 것 같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내 인내심 덕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관은 유효하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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