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겟'
구글링 한다는 말은 검색한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법이다. 내복을 입을 땐 뭔가 촌스럽고 께름칙했는데 히트텍이 등장하면서 패션의 기본템이 됐고, 배달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데 있어 쿠팡맨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무언가의 대명사가 된다는 건 실로 대단한 변화다. 중고거래는 없던 일이 갑자기 생긴 개념은 아니지만 당근마켓이 등장하면서 중고거래가 (아마도) 훨씬 더 활성화됐다는 점은 굳이 수치를 들춰보지 않아도 된다. 중고거래라면 질색하던 친구도, 엄마도, 심지어 나조차 매일처럼 당근마켓을 들락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중고거래의 맛은 무엇보다 싼 가격에 필요한 물건을 득템 했을 때 혹은 필요 없는 혹은 처치곤란의 물건을 해치웠을 때다. 적당한 값에 처분해 꽁돈(공돈)까지 생겼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나의 첫 중고거래는 판매, 물품은 고데기였다. 이름하야 보다나 봉고데기! 내 중고거래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나의 고데기 역사를 말하자면 무척 지난하고 처절(?)하다. 고데기를 탐하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부터다. 당시에는 이른바 뽕머리, 정수리 주변으로 뽕을 띄우고 굵은 컬을 넣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다. 드라이기와 드라이빗만으로는 이걸 하기에 무척 고난도의 기술과 시간과 애정이 필요했다. 똥손주제에 이걸 하기는 어림없었고 당시 등장한 고데기는 이 머리를 하기에 최적화된 아이템이었다. 대학생의 얇은 지갑이 감당하기에 가격의 벽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가성비 좋은 놈으로다가 하나 장만했더랬다. 드라이기를 못하는 손이 고데기라고 잘할쏘냐. 이러쿵저러쿵하다 손 데고, 얼굴 데고, 화상 입고, 머리는 타고 아이고.
그러는 사이 기술은 자꾸만 발달해 이게 더 나은 제품이라며 끊임없이 나를 현혹했다. 그 사이 졸업도 하고 취직도 하고 이사도 했는데 화장대 서랍 속에 쌓인 고데기가 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다리미처럼 편편한 고데기, 물 넣는 고데기, 드라이빗처럼 생긴 고데기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고데기가 여러 개라고 해서 매번 쓰는 것도 아니고 신제품이 등장해 손에 익으면 과거의 그것은 영원히 빠이빠이다.
인스타그램으로 흠모하던 긴 머리 그녀가 자신의 헤어스타일의 비밀은 '이것'이라며 강조하던 그 고데기를 또 사고야 말았다. 와우 지저스, 이것이야말로 인생고데기가 아닌가.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고데기는 없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결론지었다. 동시에 과거의 고데기들은 재활용품센터에 버리거나 누굴 줬더랬다. 당시만 해도 중고거래에 마음의 벽이 있어서 내가 쓰던 걸 쉽게 중고거래하지 못했다.
아뿔싸. 그런데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오! 다이땡 에어랩되시겠다. 아니 지가 드라이기(또는 고데기 또는 드라이기+고데기) 주제에 뭔 놈의 가격이 50만 원이 넘는다기에 있는 사람들의 돈지x 쯤으로 치부했다. 웬걸, 써본 사람들이 후기가 남달랐다. 이건 뭐 가히 혁신이라는 거다. '웃기고 있네'하며 혀를 찼지만 내심 궁금했고 너튜브에 검색해 보니 좀 괜찮아 보였다. 이미 사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친구 집에 들러 슬쩍 써보니 제법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도 한 6개월은 더 고민했을 때쯤 채널을 돌리다 다시는 없을 가격이라는 말에 홀랑 속아 넘어갔다. 앱을 깔고 쿠폰을 다운로드하고 포인트를 영끌해서 주저 없이 질렀다. 지속해서 가격을 예!의!주!시! 했던 터라 이 정도면 충분히 할인된 것이란 판단이 섰다.
역시는 역시, 이것이야 말고 신세계였다. 마지막인 줄 알았던 내 고데기 인생에 또 하나의 고데기가 등장했다. 인생 고데기라 여겼던 봉고데기 역시 화장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잠자기 시작했다. 방치한 지 6개월쯤 지났을까. 잠자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녀석이다. 과감하게 나의 첫 당근거래 리스트에 올렸다. 요리조리 사진을 찍었고 정확한 모델명을 알아뒀다. 중고거래 시세를 쓱 한 번 훑어본 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가격 4만 원에 올렸다. 올리자마자 1명에게서 채팅이 왔다. 다짜고짜 '반택 가능하세요'라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싶어 검색해 보니 '반값택배'란다. 검색해 보다 괜히 지는(?) 느낌이 들어서 일단 "아니요"라고 했다. '아, 여기서는 그냥 다짜고짜 용건만 간단히 대화하는 게 룰인가 보군' 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이 사람 요청을 거절한 뒤에 다른 사람한테 연락이 오면 다시 연락해서 "사실은 제가 반택이 뭔지 몰라서 안된다고 했는데 알아보니 될 것 같은데 다시 사실래요?" 해야 하나 초조했다. 모냥은 좀 빠지겠지만 그래도 일단 파는 게 중요하니 그 정도의 굴욕은 참아야지 하면서 택배비라고 빼줘야 하나 짱구를 굴렸다.
다행히 또 얼마 지나지 또 다른 사람에게서 톡이 왔다. 알기 쉽게 토끼님이라고 하겠다(귀여운 토끼 사진을 프사를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란다. 아! 여기서도 인사를 하고 시작하는 문화가 없는 건 아니구나 싶어 안도했다. 잔기스 여부를 묻기에 집에 가서 추가로 상세 사진을 찍어주겠노라고 했다. 상세 사진을 보내주니 마음에 든다며 거래하고 싶단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편택' 가능하세요? 편의점 택배로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소심하지만 당당하게 물었다. 내가 당근 초보라 편의점 택배는 이용해 보지 않았고 물건값에 택배 가격은 넣지 않았다고 말이다. 왠지 능수능란해 보이는 토끼님은 택배비용은 구매자가 부담하는 게 맞다며, 만나는 게 편하면 만날 수는 있겠지만 택배로 해주면 좋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아, 내가 중고거래 시장에 발을 붙이기 위해선 반택이든 편택이든 택배를 이용해야겠구나.'
초록창을 켜 검색했더니 편의점에서 편의점으로 보내는 서비스를 한다. 유명 대형 편의점 2곳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집에서 가기 편한 편의점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고 앱을 깔아 두었다. 포장도 해야 하니 집 밖에 나가 재활용 분리수거함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대충 이 정도 사이즈면 되겠다 싶은 크기의 박스와 굴러다니는 뾱뾱이를 챙겼다. 소중하게 뾱뾱이를 싸서 박스에 넣었더니 공간이 좀 남는다. 나의 첫 당근이자 편택을 기념하기(?) 위해 책상에 굴러다니던 빼빼로를 넣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예쁘게 잘 쓰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편의점으로 가서 낯선 택배를 붙이러 왔다고 하니 아르바이트생은 말도 없이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기계를 앞에 두고 끙끙대며 보내는 곳과 받는 곳의 정보를 써넣었다. 집의 주소가 아니라 편의점명을 넣으면 된다. 저울에 올려 무게를 쟀더니 730g, 가격은 1,600원이란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 주소가 노출될 열려가 없으니 이 얼마나 안심이 된단 말인가. 와우! 이래서 편택편택하는구나. 단 번에 편택의 맛을 알아차려 버렸다.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멀쩡한데 영 손이 가지 않는 옷을 비롯해 다양한 아이템들이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얼마지 않아 이사를 앞두고 있던 터라 집에 팔아치울 물건들이 차고 넘쳤다. 집에 있는 물건들을 다 팔아제낄 심산으로 물건을 솎아 내고 사진을 찍고 올리기 바빴다. 한창 올리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데 더 이상 올릴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 알고 보니 하루에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 20개로 제한돼 있었다. 아마도 이른바 업자를 거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을 것이다. 난 어쩌자고 하루에 20개씩 올리고 앉았더냐. 내일 다시 올리기로 하고 기존에 올린 아이템들을 확인하고 오는 연락을 주고받고 어쩌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아마 다음날도 올리고 그다음 날도 올리고 하는 사이 이삿날이 되어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한 곳에는 기존 집과 옵션이 달라 테이블이랑 의자도 필요하고 수납함도 모자랐다. 당연한 듯 당근앱을 켜서 테이블과 의자를 검색했다. 다행히 상태도 가격도 적당한 게 있다. 슬쩍 톡을 보냈더니 비대면 거래니 집 앞에 와서 알아서 가져가란다. 차가운 태도에 다소 위축됐지만 상태 좋은 물건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계획에 없던 러그도 함께 샀다. 이제는 사는 맛까지 알아버렸다.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언젠가 하려고 맘먹고 있던 캠핑용품도 샀다. 그런 와중에 큰 실패는 없었지만 잔잔한 실패도 있었다. 그땐 재판매를 하면 됐다. 역시 살까 말까 할 때는 사는 게 정답이다. 어느 날부턴가 눈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중고앱을 켜는 일이었다. 앱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어느 정도 경계심이 들 때쯤이었다.
영화 '타겟'을 보고 난 뒤부터 매일처럼 중고 거래 앱을 켜는 일에 대한 흥미가 뚝 끊겼다. 영화는 세탁기 중고거래 사기를 당한 주인공 수현이 직접 범인을 쫓다 휘말리게 되는 일을 그렸다. 수현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중고거래를 올려 전화가 쏟아지질 않나, 수현의 집으로 끊임없는 배달이 와서 그를 난처하게 한다. 엄마 이름을 이용해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더니 급기야 집안을 침입해 들어오기도 한다. 억울한 마음에 괘씸죄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수현의 일상을 침범하고 목숨까지 위협하기에 이른다. 중고거래라는 익숙한 소재로 표현된 공포라 더욱 뒷골이 당겼다.
영화 덕분일까. 다행히 중고거래 앱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줄었다. 그래도 차마 앱을 지우진 못했다. 지울 이유도 없다. 중고거래는 죄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