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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첩장은 받았지만 갈까 말까 고민되는 딱 그 정도 사이

영화 '내가 죽던 날'

by Ellie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외딴섬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태풍이 치던 어느 날, 섬에서 한 소녀 세진(노정의)이 사라진다. 알고 보니 유서로 추정되는 한 장 짜리 메모를 남겼고, 바닷가 절벽에서 운동화를 찾았다. 사체는 못 찾았지만 누가 봐도 자살로 보이고, 죽을 만한(?) 이유도 있어 보인다.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복직을 앞둔 형사인 현수(김혜수)는 섬을 찾게 되고, 세진의 행적을 쫓는다. 세진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죽으려고 하기보단 살려고 애썼던 흔적들이 보인다. 현수는 알게 됐다. 세진은 죽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살고 싶어 했다는 걸.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신과 닮은 표정이 보여 마음이 아프다. 세진에게 몰입하게 됐다. 남들 눈엔 집착으로 보일 뿐이다. 현수는 세진의 주변 인물을 만나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위로해 주고 싶은데 다들 자신의 이익을 따지고 꽁무니 빼기 바쁘다. 그들이 대단한 악인이어서는 아니다(물론 세진의 오빠라는 자는 한심하고 못돼 처먹었다). 한때는 세진을 돌봤고,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혹은 정황)에 마음이 아프지만 세진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일상이 뒤틀리지 않기를, 세진의 일이 자신에게 불똥 튀지 않기를 바라서다.


영화에서 주인공 현수는 동료이자 친구인 민정(김선영)에게 형준(이상엽)과 어느 정도 관계였냐고 묻는다. 그때 민정은 "청첩장은 받았지만 갈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사이 정도(정확한 워딩은 다를 수 있음)라고"했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 그 정도 사이.'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관계에 이름을 붙이기보단 관계의 ‘정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지만 잘 모르고 남 보다 못한 사이, 가족이지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사이, 그냥 옆집 사는 좀 불편하게 마주치는 사이, 직장 동료지만 청첩장을 받으면 꼭 가야겠다 싶은 관계, 갈까 말까 고민되는 사이, 그냥 축의금만 부치면 되는 사이, 왜 나한테 청첩장을 주는 거지 싶은 사이. 카카오톡 생일 알람이 떴을 때 그냥 무시하긴 좀 맘이 걸려 적당한 커피 쿠폰 정도로 축하를 보내는 사이, 2만 원 정도의 비타민을 보내는 사이, 3만 원을 넘는 적당한 브랜드의 핸드크림 정도는 보내야 할 것 같은 사이, 같은 층에 일해서 매일 같이 마주치지만 '안녕하세요' 이상의 말은 섞어보지 않은 사이, ‘안녕하세요’는커녕 목례만 나누다 보니 목소리조차 모르는 사이,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댓글 정도는 남기는 사이, 그냥 좋아요만 누르는 사이, 그냥 서로 맞팔 후 눈팅만 하는 사이, 현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SNS에서 눈팅하다 보니 웬만한 친구 이상으로 동선과 취향과 식성을 잘 알게 돼버린 사이, 분기에 한 번 정도는 보는 사이, 연례행사처럼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 오래된 친구지만 옛날 얘기 말고는 할 게 없어 맨날 추억만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소사는 챙겨야 하는 사이.


관계는 쉽게 형성되기도,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오래된 관계라고 해서 관계의 질을 담보할 수도 없고, 물리적인 시간이 짧다고 해서 관계의 정도를 의심하거나 깎아내릴 이유도 없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관계가 좋았다가 나빠질 수도 있고, 아무 사이 아닌 누군가의 작은 호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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