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척의 일생'
어느덧 새해다. 새해가 되면 괜히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새해 아침 핸드폰을 열어 보니 각종 단톡방에는 새해 첫 일출 사진이며 떡국 사진이 벌써 한가득이다. SNS 스크롤을 만지작 거리다 보니 타인들이 올린 한 해 정리와 새해 결심들도 눈에 띈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바꾸고, 어떤 사람이 될지. 벌써부터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뒤처진 것 같은 기분. 새로운 목표와 다짐이 없으면 이 해를 허투루 보내게 될 것만 같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더라도 올해의 To do list를 채우는 일이 이렇게 힘에 부칠 줄이야.
새해 첫날 영화 '척의 일생'을 봤다. 영화는 제목처럼 '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성의 일생을 다루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의 흐름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3막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 1막이 아닌 3막부터 거꾸로 시작한다. 결말을 앞세워 궁금증을 자극하는데 그의 일생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니 왠지 그저 살아가고 싶어진다. 지구가 비록 광활한 대우주의 타임라인 속 찰나에 불과하고, 인간은 한낱 먼지 같을지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위로를 전해 받은 기분이다.
영화의 시작은 다소 충격적이다. 인터넷이 끊기고, 전기도 단절되고, 큰 싱크홀이 생겨 차들이 추락하고, 건물이 휘청이고, 도로가 파괴되고, 그곳에서는 차도 무용지물이다. 차를 버리고 뚜벅뚜벅 좀비처럼 집으로 향한다. 그런 와중에 그런 와중에 학교는 무슨 소용이며 병원인들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희망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스스로 삶은 등지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을 향해 달려가기도 한다.
지구의 종말인 건지, 지구의 시계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불현듯 거리 광고판과 TV에는 '척 크랜츠'의 39년의 인생을 축하하는 멘트가 지속해서 든다. 대체 척이 누구란 말인가. '누가 봐도 회계사상'이라는 척은 사진으로만 보면 어쩌면 지루해 보이며 무슨 말을 해도 숫자를 들이밀며 꽉 막힌 소리를 할 것 같은 답답한 사람으로 비친다. 지구의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척은 대체 누구인지 모르는 채 1막은 끝이 난다.
2막에서는 척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마른 몸에 잘 빗어 넘긴 머리에 뿔테를 끼고 잘 차려입은 정장과 구두까지. 누가 봐도 회계사상이라는 척은 실제로도 회계사다. 일상에 작은 틈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의 척은 어느 날 따스하고 컬러풀해보이지만 일상은 잔잔해 보이는 어느 동네를 지난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드럼 버스킹을 시작한다. 둠칫, 두둠칫. 평범해 보이는 박자에 지나가던 행인들도 시큰둥하고 드럼 버스킹을 하는 사람도 무료해 보이는 순간, 그 옆을 지나가던 척이 갑자기 가방을 땅에 내려놓는다.
드럼 버스킹을 하는 숙녀에게 통 큰 기부를 하려는 건가 하는 뻔한 상상을 하려는 찰나, 드럼 비트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언제 합이라도 맞춘 건지 드럼 비트와 척의 댄스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흡을 이룬다. 척을 중심으로 군중이 둘러싸고 척은 붉은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춤을 추지 않겠냐는 제안이다. 때마침 오늘 남자친구에게 문자 이별통보를 당한 그녀는 최악의 하루가 될뻔했지만 척과 호흡을 이룬 댄스 덕분에 최고의 하루를 보내게 된다. 영화를 보다 보니 또다시 궁금증이 남는다. 그렇다면 척은 그저 춤을 잘 추는 회계사 사람이란 말인가.
마지막인 1막에서는 척의 유년시절을 다룬다. 척이 어쩌다 숫자와 춤과 친해질 수 있었는지, 댄서의 피가 흐르는 회계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사고로 부모와 뱃속의 동생까지 잃은 척은 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다. 깊은 슬픔에 빠진 그들은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척은 할머니에게서는 춤을, 할아버지에게서는 숫자와 함께하는 기쁨을 선사받는다. 척이 어느 낯선 동네에서 드럼에 맞춰 춤을 추다 한 낯선 여성에게 춤을 청했듯 척의 할머니는 척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학을 사랑하는 회계사인 할아버지는 척에게 수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숫자로 세상을 해석하며 이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를 알려줬다. 아마도 척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이 시간들을 통해서 형성됐을 것이다.
'나는 거대하며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수많은 품고 있는 우주이며, 그 우주를 기쁨과 행복과 슬픔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 아마도 올해도 많은 실패와 사소한 성공, 무료한 일상 중 간간히 맞닥뜨리는 잔잔한 행복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로 시작한 올해는 처음부터 꽤 운이 좋다. 올해 좋은 일이 생길 것 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어쩌면 새해 첫 날 만난 가장 큰 행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