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1.
우리는 바보가 아니라서 대부분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정도는 다 알고 있다. 배부르게 처먹으면 뱃살이 나오고, 살이 뒤룩뒤룩 찌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모르겠는가. 운동을 안 하면 몸이 약해지고 체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공부를 안 하면 멍청해지고, 술을 가까이하면 간이 나빠지고, 줄담배를 태우면 폐가 나빠지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 안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감정과 욕망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재밌게도 감정과 욕망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치환 가능한 가치일 수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전쟁 중에 많은 군인들에게는 엄청난 마약이 유통되었다. 어느 날 사지가 분해되어 전우가 고깃덩어리와 뼛조각으로 바뀌는 상황에 맨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다 보니 마약에 의존적이지 않던 군인들도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마약을 꾸준히 소비하면 중독 증세가 발현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들이 전쟁이 끝나고도 마약 중독 상태에 머무를까?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조사한 자료에서는 상당수의 군인들은 중독 증세를 느끼지 않고, 고향땅에 돌아와 이전처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약에 의존하게 된 군인들은 몇 가지 상황이 있었는데, 돌아온 고향에 가족이 없거나, 상해를 입어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전쟁이 끝나고 돌아간 고향에서도 쉼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들에게는 마약이라는 편리한 도피처에 의존하게 된다.
결국 사람에게는 상황이라는 모두에게 다르게 주어진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관되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해서 따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 중에 심각한 중독과 자기 파괴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알면서도 시도해 보고, 시도하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자기 파괴적 모든 습관과 행동은 '상황'이라는 슬픈 전제 위에서만 더욱 끔찍하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 파괴적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하고, 스스로를 정죄하는 죄악의 사슬에 묶인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 누군가는 또 다른 자기 파괴인 자해를 하거나, 속죄의 의미로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를 올리거나 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자기 파괴는 상황이 바뀌지 않은 한 쉽게 바꾸기 어렵고, 오히려 상황이 바뀌면 너무도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회사의 일이 너무 많아져서 이전과 같은 자기 파괴적 시간을 보내기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새로운 책임이 생기면서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면서 술이나 담배를 일순간에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종종 있다는 사실은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또는 추구할만한 더 큰 목표가 생기기도 한다.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보다 운동 경기에서 얻는 승리의 기쁨이 더 크기 시작하면 이제는 식사 중독에서 운동 중독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렇듯 어떠한 자기 파괴적 행동은 그것을 금지한다고 해서 해결되기보다는 건설적으로 해소될 때 폭발적으로 사람을 성장시킨다. 스스로를 파괴해도 괜찮을 만큼의 자극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건설적으로 바뀌었을 때 가지는 힘은 상당할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일까. 우리는 성공하고 세상 두려울 것 없이 잘 나가던 사람이 한순간 무너졌을 때, 더욱 끔찍하게 자신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반대로 완전히 박살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어느 날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건설적인 인간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렇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언제든 온전히 무너진 인간이 될 수도,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고 장대하게 삶을 펼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힘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힘의 방향이 반대가 됐을 때 당신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겠는가. 자기혐오는 버려라. 상황과 환경.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 욕망에는 분명한 이유와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 방향을 바꾸는 순간 인생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