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보냈어야 하는데, 사정이 생겨 이제야 편지를 보냅니다. 출근길 차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편지가 스물한 번째, 이 글들을 쓰는 동안 비와 더위, 가을 이야기를 주로 나눴는데, 이제 슬며시 겨울 문턱에 섰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것은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는 사실을 자각해 봅니다.
저는 이번 주에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고등학교로 옮겨 처음 2학년 문학 수업을 처음 맡았을 때, 이 작품 수업 준비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수업 준비는 보통 바쁜 일과 중에 틈틈이 합니다. 그때 저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아서, 이 작품의 수업을 개시해야 하는 날이 도래하기 직전에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 넘기듯 훑어 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제 곁을 정신없이 스쳐 지난 작품이 바로 『김약국의 딸들』입니다. 미항인 통영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름답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거칠기 그지없어, 이런 삶도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삶의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싶은 질문이 고개를 드는 작품입니다.
지난주 김영하 작가님의 인별 계정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의 첫 문장’을 댓글로 다는 재미난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저는 피츠 제럴드 단편선 『바질 이야기』의 첫 문장을 댓글창에 적었습니다. 그 책을 교무실 책꽂이 한편에 꽂아 두었는데, 학교 일정이 바쁘다 보니 손이 잘 가지 않더군요. 결국 끝내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놓고 읽지 않았다는 책의 첫 문장은 무엇인지 댓글들을 훑어보다가 『김약국의 딸들』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이 일었습니다. 한때 ‘알쓸신잡’ 통영 편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그 책을 들고 여행에 나섰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언젠가 그 책을 품에 넣고 통영을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미뤄 둔 숙제가 찾아온 셈입니다.
통영에 가야겠다. 요즘 무척 바쁘지만,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꼭 다녀오자, 마음속에서 그런 결심이 자랍니다. 김약국의 딸들에도 저의 최애 시인인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우물도 구경하고, 왜 통영이 미항인지도 직접 눈으로 보고...
훌쩍 떠난 여행지에서 읽은 책 중에 특별히 남은 책이 있으신가요? 전 일일이 기록해 두지 못해 아쉽지만, 또렷이 떠오르는 책들이 몇 권 있습니다.
오래전 동생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라인강 유람선 위에서 ‘오헨리 단편선’을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여행에는 단편소설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행 중간중간의 긴 기다림을 달래기에, 그 기다림이 느닷없이 끝났을 때 이내 책을 덮고 다시 길을 걷기에는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 소설이 딱입니다. 돌이켜 보니, 단편 소설은 육아를 하다가 읽기에도 딱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잠들었을 때 읽다가, 그 고요가 이내 끝이 났을 때 이내 책을 덮고 아이를 돌보다가 다시 짬이 나면 읽기에도 딱이지요. 그 유럽 여행 이후, 여행 가방엔 단편소설집을 꼭 한 권 챙깁니다.
친한 동료 교사와 함께 떠났던 터키 여행에서는 살림지식총서의 『오스만 제국』을 들고 갔습니다. 터키 여행은 내내 역사 공부가 따라붙었고, 그 책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밤버스 안에서는 별자리에 관한 책을 펼쳐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별이 무엇일지 하나하나 짐작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별자리 읽는 법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 일본 나고야 여행에서는 기차를 오래 타야 하는 일정을 고려해서 여러 권을 챙겼습니다.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은 그 책들 중 한 권입니다. 일본어가 공기 속을 파고드는 곳에서 일본인 저자가 쓴 책을 읽는 맛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묵직했지요.
『망고와 수류탄』의 저자는 오키나와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입니다. 오키나와인들의 삶을 독특하게도 질적사회학의 방법인 생활사연구를 통해 접근합니다. 그 책에는 2차 세계 대전 때 군대의 강압 속에 자결로 내몰린 오키나와인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때 군인들에 의해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이 수류탄입니다. 그 책의 발걸음을 따라가다가 자결을 강요당한 사람들 가운데 재일 조선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김숨 작가님의 『오키나와 스파이』에서 다뤄집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김숨 작가님 소설을 읽으며 그 겨울은 마음이 무척 무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여행길 배낭에 읽을 책을 꼭 챙겨 넣곤 했습니다. 모든 여행과 책이 선명히 남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책들은 특정한 풍경과 공명하며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올라 저를 멈춰 세웁니다. 아마 이번 겨울, 통영의 바람과 『김약국의 딸들』도 그렇게 서로를 불러낼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10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얇은 패딩 점퍼 정도는 꼭 챙겨 입어야 할 것 같은 기온이네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요!
다음 주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