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긴 연휴, 잘 지내셨는지요?
저 또한 오늘은 연휴의 끝을 맛보고 있습니다.
긴 시간을 쉬면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고 보니 소중한 연휴를 늘 시간을 보내왔던 방법대로 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하는 방법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 쉬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쉬는 법’ 하니까, 연휴에 읽은 클레어 키건의 최근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의 한가운데 실린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하인리히 뵐의 집에 방문한 주인공을 찾아온 한 남자.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라고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저는 하인리히 뵐의 집에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저 또한 소중한 인생을 케이크나 만들고 수영이나 하며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케이크나 만들고 수영이나 해야 그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 속 까칠한 인물의 빈정거림은, 케이크를 만드는 일이 ‘해야만 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가’ - 곧 무엇을 해야 사는가, 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야 사는가- 를 묻게 했습니다.
연휴 초반엔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Louise Bourgeois: The Evanescent and the Eternal)》 전시를 보기 위해 호암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오래전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Maman)’을 리움 앞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입니다.
그때는 그 거미가 그녀의 작품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제 어깨를 단숨에 잡아당겼나 봅니다.
대형 거미가 시야에 들어오자 저는 잊고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던 제 모습, 그날 입었던 살구색 블라우스, 그날 만난 친구가 입은 쑥색 티셔츠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작을 둘러보고 왔으니, 하인리히 뵐의 집에 가서 케이크나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뭐라도 깊은 감상을 남겨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전시에 아이와 함께 갔기에 사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없이 둘러보았습니다.
설치 작품이 많아서 그 사이를 관람하는 아이가 작품을 훼손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단속하기에 바빴지요.
한편 그녀가 구축한 예술의 세계가 아이에게는 지나친 것, 금기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작품이 지니는 낯섦에 초점을 맞추면 즐거운 감상의 시간이 될 거라 여기며,
눈과 마음은 보느라 바쁘고 손은 한편 아이를 놓칠세라 힘을 꽉 준 채 걸었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에는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혐오(일부 비평에서는 이를 ‘남성 권위,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적 응시’로 읽습니다),
그로 인한 자신의 상처와 그 상처로부터의 치유, 자신을 키운 엄마의 모성애, 엄마가 되고 느낀 자신의 모성애, 그리고 딸들이 지니는 엄마에 대한 애증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살풀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거기에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몸의 움직임과 장단으로 드러내며, 공동의 목격 속에서 감정을 흘려보내는 과정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정서적, 상징적 치유로 느낍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업 역시 개인사에서 비롯된 상처를 조형적 형태로 드러내고,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변주하는 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상처에 방점을 찍으니, 다시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에 실린 서늘한 작품 〈남극〉이 떠오릅니다.
저는 세 편 가운데서도 〈남극〉이 그 정서를 가장 응축해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참고: 같은 책의 〈So Late in the Day〉는 프랑스에서 단행본으로 먼저 출간되며 '여성혐오(Misogynie)'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부르주아의 작업은 가족사와 가부장적 권위가 남긴 상처를 시각화하는 데 방점이 있고,
키건의 단편은 여성혐오적 시선이 일상에서 어떻게 감각되는지를 여성 주인공의 체험을 통해 포착합니다.
그나저나 아들을 데리고 한 손에 힘을 빡 준 채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보러 다니는 나는, ‘마망’ 앞에 선 또 하나의 마망이었습니다.
이제 명절엔 제사상을 올리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삶의 기본값으로 이어 가는 일상,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고 밀려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주해야 하는 여성.
그게 곧 나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 자각은 저 또한 ‘제 자리’라고 부르는 자리에 끊임없이 머무르게 하지요.
그 자리에 있는 한, 이런 주제(여성, 남성, 가부장적 권위 등을 다루는) 글은 관찰이 현상을 바꿔 놓는 양자역학의 아이러니처럼 저를 어렵게 만듭니다.
이 모순적인 삶을 매끈하게 살 방법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그에 대한 답은 지금은 없겠지요. 다만 조금 더 매끈하게를 추구할 뿐).
이 물음을 오늘의 질문으로 붙잡아 두고, 내일을 다시 펼쳐 보겠습니다.
10월 중순이 되면 단풍이 아름답게 들더라고요.
또다시 맞이할 자연의 절정을 만끽하는 가을날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