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모자란, 가을의 기운이 스며드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어제 다자이 오사무의 짧은 수필 ‘아, 가을’을 읽었습니다.
작가는 ‘가을은 여름과 동시에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감은 이미 여름에 열매 맺으며, 잠자리는 여름의 곤충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가을은 이 여름 안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우리를 비웃으며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다자이 오사무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여름밤,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산책길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가을이 도래했음을 감각하는 경험은 꽤 일상적인 일이니까요.
생각해 보면, 여름은 뜨겁게 차올랐다가 서서히 소멸하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바로 그 소멸의 길 위에서 시작되고, 그 길은 모든 생성의 기운이 멈춘 듯한 겨울로 이어집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가을이 마치 기본값처럼 존재한다고 본 것이지요. 소멸을 본질로 본 듯한 다자이 오사무의 시각이 서른아홉에 이 세상에서 스스로 소멸하기로 선택한 그였기에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소멸하는 존재인 우리에게 삶은 무의미한 과정에 불과할까요? 이미 인생의 가을 즈음에 와 있는 저에게 남은 인생은 그저 소멸로만 치닫는 과정일까요?
지난 목요일, 동네 도서관에서 정여울 작가님의 <데미안 프로젝트>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데미안 프로젝트’는 강의 제목이자 작가님의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가을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깊이 읽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데미안>을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도덕 선생님의 권유로 읽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에서, 학급마다 한 명씩 이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 올 학생을 찾고 있는데 하고 싶은 사람?, 하고 물으셨지요.
저는 호기롭게 손을 들고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범우사 사루비아 문고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표지에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싱클레어가 그렸던 데미안의 얼굴이었나 봅니다.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싱클레어에게 꽤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저와 결이 맞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다소 힘겨운 중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독해에 꽤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나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은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의 명백한 비유인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독서를 마쳤습니다.
그때는 대체 어떤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제가 한 일인데도 감조차 오지 않네요. 매우 어지러운 글이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어린 학생에게 그토록 어려운 책을 읽게 하셨는지 그 궁금한 마음만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다지요.
하지만 살다 보니, 그 유명한 문장에 담긴 의미는 자연스럽게 깨우친 듯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제겐 고전 읽기의 첫사랑입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는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다음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였고, 그다음 책은 <싯다르타>였습니다.
다소 어려웠지만 <유리알 유희>를 대학교 새내기 때 열심히 읽었던 생각도 납니다.
도덕 선생님의 숙제로 인해 한 작가 전작 읽기 주의의 독서 습관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던 헤르만 헤세의 그림 전시회에도 갔던 기억이 납니다.
텍스트힙의 분위기가 없던 시절에 이렇게 책을 읽는 방법을 알았으니, 도덕 선생님의 숙제는 제게 책 읽기의 한 방편을 배운 의미 있는 시간을 부여한 셈입니다.
다시 정여울 작가님의 <데미안 프로젝트>로 돌아옵니다.
데미안을 백 번도 넘게 읽으며 책을 쓰셨다는 정여울 작가님의 강의를 듣기 전까지 제게 데미안은 '알'로 표상되는 편안함의 세계를 깨고 나와 에고(Ego)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업을 지닌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강의를 통해 데미안이 중년의 삶을 시작한 제게 주는 다채로운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교육심리학 시간에 들었던 개념인 내 안의 내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와 내 안의 기쁨(Bliss)을 실현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 그것이 바로 중년이었습니다.
정여울 작가님께서는 자신의 블리스(기쁨)는 글쓰기라고 하셨습니다.
제 안의 블리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 또한 글쓰기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금메달’이라는 제목의 글짓기 과제를 제출하고 선생님께 큰 칭찬을 들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까지 하셔서 아이가 글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알아두시라고 하셨습니다. 국어 교사로 살고 있는 제 삶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칭찬이 제 삶에 끼친 영향이 꽤 컸던 것 같습니다. 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대입 원서를 쓰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결국엔 글과 가까이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제 안의 블리스가 글쓰기라고 말한다면, 아주 자격이 없는 기쁨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아직까지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내 안의 역량들을 두루 알아보는 부지런함을 겸비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데미안 프로젝트>는 칼 융의 심리학적 개념 중,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토대로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아니마는 여성성을, 아니무스는 남성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정여울 작가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 두 자아를 통합하여 개성화의 경지로 나아가기에 좋은 시절이 중년입니다. 그리고 그 경지로 나아가는 길은 내 안의 블리스를 붙잡고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정여울 작가의 <데미안> 해석에서 라캉의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의 개념도 데미안을 해석하는 유의미한 틀이었습니다.
어려운 인문학적 개념들을 쉽게 이해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제게 남은 인생의 시간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강의와 책을 통해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편지를 쓴 지 어언 넉 달이 되어 갑니다.
한 주간 읽었던 책을 토대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정여울 작가님의 <데미안 프로젝트>라는 책도 그런 작업으로 보였습니다.
저야 아직 한 권의 책에 관한 독후감을 책 한 권으로 써내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 편지 쓰기를 지속해 가면서 그러한 힘을 기르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지지난 주에 소개하고 싶었던 책인데, 주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제 마음의 도서관에만 보관한 책이 있습니다.
일본의 최고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 수상작인 <헌치백>입니다. ‘헌치백(hunchback)’은 영어로는 곱추 또는 등이 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글을 쓴 이치카와 사오는 중증 장애를 가진 작가로, 자전적인 사연을 이야기로 썼습니다. 장애인의 삶과 욕망을 진솔하게 그린 이 작품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편견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무엇보다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책의 말미에 덧붙은 작가의 수상 소감이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종이책이 얼마나 불편한 존재인지 설파하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전자책보다 아날로그 감성인 종이책이 의미 있다고 발언했던 시각이 그 얼마나 정상주의의 관점인지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평을 넓히는 일을 게을리하면 결국 나의 무지를 큰 소리로 고백하는 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에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이치카와 사오의 삶을 보며, 다시 데미안 프로젝트를 떠올립니다. 아쿠타가와 상을 노려서 글을 썼고, 그 상을 노린 이유가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발언대를 얻기 위함이 크다는 고백에서, 현실 세계인 상징계를 넘어서 개성화를 통해 실재계를 실현하는 눈부신 이야기를 목격합니다.
그녀의 작품 <헌치백>은 장애인의 욕망을 다룬 솔직하고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의 작품보다도, 작가 이치카와 사오가 이룩한 서사 자체가 이 세상에 더 필요한 이야기라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야말로 '데미안 프로젝트'의 현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25년 한 해도 이제 마지막 여정을 향해갑니다.
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지구가 물리적인 공전을 이어가는 것이 계절의 변화일 뿐이지만, 태양이라는 절대적 열기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내 생애 남은 과업을 떠올려 보는 일. 이번 주는 직장에서 일이 많아 조금 부산스러웠지만, 제 과업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진 한 주였다고 다독여 보겠습니다.
당신의 삶의 과업은 무엇인가요?
그 내밀한 일을 저 또한 응원하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길요~! 이번 주도 제 편지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