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제 편지를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그 유명한 릴케의 시 ‘가을날’이 떠올라 전문을 공유해 봅니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완성에 이르게 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시의 풍요로운 앞부분에 마음이 갔는데, 요즘은 마지막 연에 더 오래 눈길이 머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이 구절이 꼭 가을엔 고독하다고 선언한 것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실존적 고독을 마주하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라는 독백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지난 편지에서 언급했던 정여울 작가님의 <데미안 프로젝트>의 주제 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사유의 과정에는 보편적인 흐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는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생애 주기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삶이 펼쳐진다는 의미에 가까울 겁니다.
어쩌면 낙엽이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는 가을은, 삶의 깊이를 더하고 그 장을 넓혀가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중년에 접어들며 비로소 깨닫게 된 가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건 자의적인 해석일까요?
그런데 시 속 인물은 그 고독을 마주하며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씁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깊은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일까요? 홀로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매주 주말 이 편지를 쓰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까?' 하는 질문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릴케의 시를 통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곧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많이 분주하시지요?
저희 딸아이는 연휴 직후에 중간고사를 치릅니다. 연휴가 길어 하루 이틀쯤 교외로 나가볼까도 싶었지만, 아이는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불안한지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답니다.
이번 추석에는 긴 시간 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미뤄두었던 책들을 펼쳐볼 생각입니다.
몇 권의 책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걸음을 떼어볼까 합니다. 독서가들의 로망을 제 인생 가장 긴 연휴에 실현해 보겠다는 기대를 품어 봅니다.
여기에 클레어 키건의 서늘한 신작 『너무 늦은 시간』, 늘 소설로만 접했던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 『너무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도 더했습니다. 좋은 시를 더 깊게 읽고 싶은 마음에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를,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려 『홀로 중국을 걷다』를, 그리고 동료 소설가들이 사랑하는 작가 윤성희의 에세이 『느리게 가는 마음』도 구해 두었습니다.
몇 권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금씩 읽어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책과 함께 사부작거리다 보면, 길기만 할 줄 알았던 연휴도 금세 지나가겠지요. 모처럼의 휴식에 들떠 지나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들이 제 안에 쌓여, 또 어떤 긴 편지를 쓰게 해 주겠지요. 이번 연휴에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긴 연휴 잘 보내시고, 다음 편지로 뵙겠습니다. 다음 주는 연휴 기간이라 한 주 쉬어 가려합니다. 두 주 동안 잘 지내다가 소식 전하겠습니다.
흥겹고 충만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