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토론, 학습조직이 더 유리한 이유
타인을 움직이는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힘은 물리적 강제력이다. 어느 국가에나 군대와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다. 다만 한 국가의 군대와 경찰력의 행사가 늘어나는 경우 비극과 불행도 함께 늘어난다. 국민의 행동이 타인의 물리력으로 강제 당하는 상황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신체적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문명은 이 물리적 상황을 정보적 상황으로 바꾸어 가면서 발전해왔다. 즉 정보를 처리하는 머리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할 여지를 늘려감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신장시켜 온 것이다. 채찍을 휘두르는 원시적인 직접적인 물리력의 행사가 아니더라도, 물리적 강제력의 위세를 직접적인 배경에 두고 내리는 지시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기를 이 시대는 기대한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나누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협력할 줄 아는 현대의 문명 세계를 일부 인류가 열어냈다. 하지만,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나누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협력'하는 과정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똑똑해진 구성원들과 그러기는 더 어렵다.
여전히 직접적 물리력으로 타인의 행동을 강제하고 싶은 충동이 솟아난다. 그리고, 문명과 역사를 되돌리는 듯한 일들이 여전히 벌어진다.
왜 그런지, 보다 문명적인 세상을 만드는 좀 더 쉬운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먼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이란 것이 무엇인지 밝혀 보아야 한다. 사람이 세상을 경험하고 생각하는 과정은 복잡하다. 이에 철학과 심리학은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
우선 인간의 생각은 대상과 감각적 교류를 하면서 발전하여 간다. 대상이 몸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오고 하나씩 둘씩 나를 만들어간다. 나의 생각을 만들며 이는 동시에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생각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아주 짧게 생략적으로 기술하는 것이어서 허술하다. 다만, 한 번 쯤 되새겨 보는 보탬이 되기를 살짝 바랄 뿐이다.
주체(인간)가 사물을 바라보면 그 사물(thing)은 대상(object)이 된다.
사람은 외부 세계에서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감각에서 시작된다. 칸트는 우리가 대상을 직접 알 수 없고, 오직 감각을 통해 나타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사물 자체(thing-in-itself, 물자체)'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서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이 아닌 현상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인간은 감각(sensation,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므로, 이 오감이 대상과 소통하는 통로이다. 이는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며, 감각 경험을 통해 지식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감각은 외부 대상에 대한 첫 접촉점이자 모든 경험의 기반이 된다.
그런데, 이 감각은 감각기관(예: 눈)이라는 물질로 되어 있고, 사람마다 이 감각기관의 성능은 다르다. 그러므로 '사물 자체'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또한 오감 외에 '사물 자체'의 특징을 직접 알아낼 방법은 없다. 자외선, 적외선, 고주파, 저주파 등을 우리는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제한적으로 세상(대상)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감각으로 얻은 정보는 지각(perception) 과정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 데이비드 흄은 지각을 경험의 시작으로 보고, 인간의 모든 지식이 감각적 지각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흄에 따르면 지각은 경험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게 하며, 이는 반복되면서 신념과 지식으로 자리잡는다.
어떤 대상을 B이거나 13으로 지각하는 데는 '사물 자체'만이 아닌 인간의 작용이 결합된다. 위 그림에서 가운데 써진 글씨는 같은 모양이지만, B로 지각하거나, 13으로 지각할 수 있다. ABC로 있을 때는 B가 B인 것이 명백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A B C / A 13 C, 12 13 14 / 12 B 14 모두 가능하다. B냐 13이냐가 다툼이 없는 사실의 문제로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다툼이 있는 인간의 해석의 문제, 선택의 문제, 맥락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매우 명백한 것마저 명백한 것은 아니라는 겸손이 필요하다.
지각이 반복되면 경험(experience)으로 축적된다. 존 듀이는 경험이 인간 학습과 사고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경험을 통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실용적인 지식을 쌓고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했다. 경험은 단순한 지각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을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맞다. 이점에서 흔히 착각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경험에 포함된다. 고전을 쓴 성현이나 과학자들의 이론의 습득 또는 공부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론보다 경험(실행만을 의미하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존 듀이 또는 경험학습이론의 핵심은 결국 개개인이 주도적으로 바깥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고 축적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직관(intuition)은 복잡한 사고 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직관을 인간이 시간과 변화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직관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의 초월적인 차원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더 깊은 차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머니가 딸이 대려온 사윗감을 보았을 때, 단박에 호불호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 수십년의 인생을 살면서 농축한 경험이 일순간의 느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직관은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갈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데이타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그 사윗감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더 온전하다고 보기 어렵다. 직관도 데이타 분석도 모두 필요하다.
표상(representation)은 대상(세상)을 머리속에 넣은 결과이다. 직관과 지각을 통해 우리는 대상에 대한 표상을 형성한다. 칸트는 표상을 우리의 인식 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화된 이미지나 생각으로 정의했다. 표상은 감각을 통해 얻은 정보를 재구성한 것이며,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는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과 아는 것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이것을 반성적이고 추상적인 의식 속으로 가져올 수 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면, 철학적 분별력이 그에게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에게 분명해지며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태양을 아는 것이 아니고, 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양을 보는 눈과 땅을 느끼는 손을 안다는 사실을. 그를 둘러싼 세계는 오직 생각으로서만 존재하며, 즉 그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다른 것이란 생각을 형성하는 그 자신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이 현상(phenomenon)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의 인식 틀에 따라 필터링된 것이며,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우리는 외부 세계의 본질이 아닌 그에 대한 표상과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은 단순히 감각적 인식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향적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현상을 우리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보고,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 구조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다.
칸트의 현상은 인식의 틀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며, 그 뒤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 후설의 현상은 우리의 의식과 대상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경험의 본질이며, 이를 통해 대상과 의식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강조한 반면, 후설은 인식의 과정을 분석하고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려는 접근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개념(concept)은 한 개의 생각을 말한다. 경험과 표상을 통해 우리는 대상 하나하나를 생각할 수 있도록 이름 붙여 이해한다. 플라톤은 현상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이데아'를 통해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감각적 경험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므로, 개념을 통해 진리와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개념을 통해 대상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며 이해한다.
생각(thinking)은 경험, 지식, 감정 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정신적 과정이다. 데카르트는 사고가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사고가 인간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개념을 바탕으로 사고하며, 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인식하며, 자기 위치를 규정한다.
신념(belief)은 우리가 경험한 것, 학습한 것, 또는 사고 과정을 통해 '옳다고 받아들인 것'(예: 노력하면 성공한다.)이다. 사고 과정(thinking)을 통해 여러 개의 생각이 결합되면, 무엇이 옳다는 특정 결론이나 믿음(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하나의 생각과 이를 연속하는 사고 과정은 신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특정한 신념(Belief)이 생기게 된다. 신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감각의 불완전성, 지각의 오류와 편견 등 생각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사실에 기반을 두기 어렵다. 인간의 한계상 사물 자체를 알 수 없으므로 어떤 사물이 어떨 것이라는 추정만이 생각과 신념의 토대가 된다. 게다가 스스로 아무리 진실하려 하여도 감각 기관의 불완전성을 온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다.
이런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생각 속에서 신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신념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형성하는 강력한 요소로, 많은 경우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의견(opinion)은 생각(신념)을 타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생각은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만, 사회적으로 공유될 때 의견으로 발전한다. 여기서 사회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파트를 사야지.'와 같은 의견은 대부분 옳음을 주장하는 신념을 품고 있다.
'아파트를 사는 것이 재테크에 도움되는 것이 맞다.'는 옳음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달리 생각하는 사람과 만났을 때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아침밥을 먹자/말자.' '이사를 가자/말자.' 의견은 자주 불일치를 일으키고 사회문제의 근원이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해 진리가 발견되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의견은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발전한다고 본 것이다. 사회적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고, 대화를 잘 하는 것이야 말고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대화를 잘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견을 마음놓고 꺼낼 수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다루어 현명한 결정에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저 서로의 다른 생각(의견)만 나열하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의미를 다하지 못하고 진정한 대화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결정(decision)은 무엇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으며, 그 결정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존재는 본질(본디 주어진 특성)보다 앞서며,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본질을 창조한다. 결정은 신념과 가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과정이다.
결정은 신념에 기초하는데, 그 신념들은 취약한 감각, 지각, 팩트의 기반 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다시 검증할 매커니즘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리더는 이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개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신념에 기반하여 결정할 것이고, 집단의 경우에는 각자의 의견(이견)을 다루어 집단의 결정하게 된다. 이때 생명체로서의 개인적 결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의 유지와 진전을 위한 선택이 될 것이다. 집단의 경우에는 이에 대하여 서로 경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각자의 생명을 위하는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일종의 목숨 건 일이어서 쉽지 않다. 앞서 말한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조직과 사회 문제의 해결능력을 좌우한다.
행동은 결정의 결과로 현실에서 나타나며, 사회적 상호작용의 근본이 된다. 우리는 가치와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집단(또는 조직)은 집단의 결정을 내리고 집단의 행동(또는 조직행동)을 한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적 발전이 정신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상호작용과 갈등을 통해 문명과 문화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대화(dialogue)의 과정은 곧 이 변증법적(dialectic) 과정이 된다. 문명은 사람들의 협력과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대화의 다른 말은 소통이고, 소통의 내용은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의 결정으로 원활하게 모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의견을 하나의 결정으로 모아가는 능력'이 문화와 문명의 핵심 엔진이다. 물리적 강제력으로 똑똑해진 구성원을 이끌기 어렵다.
턱없이 줄여서 말한 것이지만, 브러치로서는 긴 글이 되고 말았다.
정리하면, 인간은 외부 대상을 감각하고 지각하며, 경험과 직관을 통해 표상을 형성하고 개념화해 사고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사고는 신념과 의견으로 구체화되고, 신념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며 행동으로 실현된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편견과 오류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이는 감각적 한계, 인지적 편향, 사회적 환경 등의 다양한 영향으로 인해 개인의 신념과 가치 체계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표면적인 대화가 아닌 깊은 대화, 학습, 숙의가 필요하다.
퍼실리테이션(북돋움, 내모)은 이런 과정이 쉽도록 돕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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