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에서 온 여자

3화 좌표, 금성

by Stardust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만난 리게이아는 기차를 타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금성에 돌아갈 거라고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그녀의 모습은 어제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제 이름은 리게이아에요.”


그녀가 어젯밤 메모를 한 손등을 들어 보였다.


“아… 당신이 그 호수군요. 난 그것도 모르고 어제밤에…”


나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타이탄에 오기로 했을 때 내가 직접 골랐죠. 난 정말 이 호수의 이름에 반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로 듣는 ‘리게이아’는 전혀 다른 이름처럼 들렸어요. '맑은 소리를 내는 자'……. 당신이 그렇게 불러주니까, 내가 정말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뻤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정말 음표가 달린 듯 통통 튀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당신 이름은요?"

"이안. 기쁨과 평안이란 뜻이죠."

“이안. 이안…… 멋진 이름이네요.”


그녀가 발음하는 내 이름이 듣기 좋았다.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뭐, 부모님의 성급한 희망이 담긴 이름일 뿐이에요. 이름만 보면 아주 잘 살고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주머니 속 이름이 적힌 성간여권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나의 좌표는 기쁨도 평안도 없는, 그저 메탄 가스 자욱한 변방의 위성에 멈춰 서 있었다.


“이안, 우주 최고, 커피 마시러 와요. 내가 직접 내려 줄테니까. ”


그녀는 길고 하얀 손을 뻗어 내 손등에 주소를 적어 주었다.

금성 라퓨타 710번지.

내가 가보겠다고 대답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펜끝이 닿았던 손등이 이상하게 화끈거렸을 뿐이다. 그렇게 금성에서 온 여자가 떠났다.



리게이아 호스텔에 혼자 남은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청춘을 흘러보내면서 그동안 지나쳐 온 별들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누구의 안부도, 나의 미래도 궁금하지 않았다. 궤도를 이탈한 위성이 되어 영원히 떠도는 걸 아닐까,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열흘 째 되는 날, 창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타이탄에서 비 내리는 풍광은 처음 보았다. 공처럼 커다란 크기의 빗방울이 슬로 모션 영화처럼 느리게 내렸다. 텅 빈 로비에 혼자였다.


서늘한 기운에 커피를 주문했다. 어느새 바리스타가 된 지배인은 드립 커피를 내려주었다.

똑. 똑.

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 한방울 한방울 천천히 떨어졌다. 잔잔한 표면에 파르르 동심원이 번지고, 연이어 떨어지는 검은 커피 방울.


창밖 비 내리는 풍경과 어우러져 무언가 내게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 커피는 쓰지 않았다. 향기도 더 없이 좋았다.


할머니도 이 향기에 나를 떠올리셨던 걸까?


지구에서의 시간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이 커피 잔 속에서 사라졌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조차 이대로 흩어지는가?



사막에 떨어져 허공으로 느릿느릿 스러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홀짝였다. 빗물이 창밖 어딘가에 떨어졌다. 문득 창틀에 고인 빗물 위로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 밖 푸른 호수가 가득했다.


빗방울이 바닥에 닿아 부서지는 순간, 조명 빛을 받은 사막이 에메랄드빛으로 번졌다.


대기 중의 가스와 굴절된 빛이 섞여 만들어낸, 느린 찰나의 호수.


호수의 비취색 수면 위로 잘게 부서진 빗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무수한 동심원들이 일렁였다. 수천 개의 투명한 유리 구슬이 은쟁반 위를 구르는 듯한 서늘한 공명이 들려왔다. 리게이아가 말했던, 바로 그 '맑은 소리'였다. 척박한 사막 위에서 피어난 호수의 소리는 맑고 투명했다. 비처럼, 음악처럼.


그제야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녀는 100km를 달려가 호수를 본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 척박한 기지 안에서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호수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어디서든 호수를 보는 법을 알려주고 간 것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이 곧 호수였다.


나는 제대로 씻지 않아 꾀죄죄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잉크는 이미 흐릿해져 '라퓨타'라는 글자만 겨우 남아 있었다.


"바보같이..."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나는 지워진 숫자를 채워 적었다. 지워져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때, AI 지배인이 다가와 물었다.


“보이나요?”

“저거...호수 맞죠?”

“네. 비 내리는 리게이아 호숫가에서 커피 한잔. 우리 호텔의 자랑거리죠.”


눈썹을 찡긋하며 커피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감싸 쥐자, 손등에 새로 적어 넣은 주소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문득 금성 커피 맛도 궁금해졌다.


나는 비에 젖은 사막 위로 나타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호수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외면하려 하면 선명해지는 저 물결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또 마셨다.


밤이 되자 비가 그쳤다. 희부연 하늘에 떠 있는 수없이 많은 달들 사이로 창백한 푸른 별을 찾았다. 지구였다. 손톱 끝에 걸릴 만큼 작아진 고향이 애틋하게 반짝였다.


근처에서 작은 샛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주에서 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금성. 구름 위에서 리게이아가 사는 별. 그녀의 윤기나는 붉은 머리와 반짝이던 미소가 떠올랐다.


궤도를 이탈했다면, 좌표를 다시 정하면 된다.


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243일의 낮이 이어지는 그 뜨거운 행성으로 가면, 나도 비로소 나만의 좌표가 선명해 질 것 같았다.


지구로 돌아가기 전,
금성에 하루만 들르기로 했다.


그녀가 내려주는 끝내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서른이 되고 나면,

어쩌면 다른 무언가가 보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표지는 2023년 5월 23일 21시 21분, 밤하늘 사진입니다. 실제로 달과 금성이 가장 가깝게 만나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우'를 보여주었던 날 중 하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