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에서 온 여자

2화 만남, 리게이아

by Stardust


AI 바텐더가 초록 레몬 조각이 떠 있는 칵테일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저쪽 손님께서."


고개를 돌리자, 바 끝에 앉은 여자가 잔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허스키한 웃음소리가 음악 사이로 낮게 깔렸다.


내가 잔을 들어 고마움을 표하자 그녀가 내게 윙크를 날렸다.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윙크를 잘 못했다. 언제나 두 눈이 동시에 감기곤 했다.


"화성인?"


목소리와는 달리 앳되어 보이는 동안이었다.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또렷한 하얀 얼굴에 녹색 눈이 신비로웠다.


"아뇨. 지구인. 이거, 고마워요."


술잔에 든 비너스를 마셨다. 어딜 봐서 화성인처럼 보일까 궁금했지만 되묻지 않았다. 나 역시 아직 행성인 간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데 서툴렀다.



“나는 금성인.”


금성. 비너스. 새벽의 여신.

그녀의 풍성한 곱슬머리에 밝고 환한 주홍빛 머리색은 금성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입술도, 뽀글뽀글 펌 머리도, 꽃 자수가 고운 원피스도 온통 새빨간 붉은색이었다. 마치 작열하는 금성의 열기가 응축된 듯,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강렬한 불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옮겨와, 나에게서 반 뼘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앉았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국의 향기가 나를 감쌌다.


“금성에는 아직 못 가봤어요. 온천이 그렇게 많다면서요? “


뜬금없는 온천 타령에 스스로가 한심해질 때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나는 당황을 감추려 잔을 고쳐 쥐다 그녀의 손등을 보았다.



처음엔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문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명 아래 비친 그것은 잉크로 촘촘히 채워진 기묘한 기록들이었다. 누군가의 손등을 그렇게 오래 쳐다보는 것이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암호를 해독하려는 고고학자처럼 그 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손등을 내 쪽으로 살짝 기울여 보였다.


“아, 맞아요. 금성에는 온천이 좀 많다고들 하더라고요. 하지만 나는 물이 귀한 공중 도시에서 살아요. 뜨거운 바람이 온천수보다 더 익숙하죠.”


그녀는 손등에 새겨진 문신만큼이나 매혹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성의 하루가 얼마나 긴지 알아요? 하루가 곧 일 년이죠. 금성은 자전과 공전주기가 같거든요."


그녀가 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마치 그 느릿한 회전이 금성의 긴 하루를 닮은 듯했다.


"어, 여기 타이탄과 같은 원리네요?"


내가 아는 척했다. 타이탄의 하루는 지구 표준시로 15일이었다.


"맞아요. 다만 지구 표준시로 243일이 하루니까, 좀 더 길죠?"

"맙소사! 하루가 243일요? 상상이 안 돼요?!"

"그래요? 나도 지구의 하루가 상상이 안 되는 걸요."


그녀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금성도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회사에 출근해 일해야 하는 건 아니죠?”


내가 또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젠 귀까지 벌게져 있을 거야.


토성인들은 자체 자전 주기에 맞추어 일을 하기 때문에 160시간 연속 일하고 160시간 연속 휴식을 취했다. 다들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면서 버텼다.


토성에서 일하려면 여기 시간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하지만 토성에 있다 보면 태양과 떨어져 있는 만큼, 시간도 빠르게 흘러 더 빨리 늙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뭐 대단한 걸 누리자고 그렇게까지 일을 해요?"

"그러니까요."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 보였다. 그녀는 자유로워 보였다. 영혼도 자유로울까?


"우리 집은 하늘에 떠있어 서늘해져도 40도가 넘어요. 예쁜 코트를 샀는데, 입어 보고 싶었죠. 눈도 보고 싶고,,, 와보니 따뜻한 고향이 그리워졌어요.”

“금성 하늘색은 무슨 색인가요?”

“활활 불 타오르는 오렌지 색이죠, 주홍빛일 때도 있고. 온도가 아주 높은 여름에는 보랏빛을 띠기도 해요."

“당신 머리색처럼요?”

“맞아요. 딱 이런 색.”


그녀가 붉고 긴 머리를 흔들어 보이자, 눈앞에 오로라가 물결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커다랗고 뾰족한 귓부리가 나타나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일 년에 딱 두 번만 지구를 볼 수 있죠. 새벽 동틀 때와 해가 질 때. 나는 그 순간이 되면 선글라스를 끼고 마당에 나와 기다리죠. 눈도 깜짝하면 안 돼요. 찰나에 사라져 버리니까. 그래서 더 감동이죠."


그녀는 녹색 눈을 감으면서 아스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태양계 행성 칵테일을 모두 마셔보았다. 취한 우리는 시간과 인생에 대해 떠들었다.

금성은 태양 중력이 강해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것일까?


나와 동갑이라는 그녀는 밝고 앳되고 환했다. 우리는 잘 통했고 서로에게 끌렸다.


어느 별에서 본 하늘이 제일 예쁜 지, 내기도 했다. 태양이 각 행성의 주 대기 성분과 만나 각기 다른 빛을 띠게 되는 것이었지만, 행성마다 다른 하늘색은 행성 고유의 성격이나 기질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연코 짙푸른 해왕성을 꼽았다. 아름답지만 차갑다고 말했다.

그녀는 금성이라고 우겼다. 뜨겁지만 아름답다고 했다.

서로가 본 적이 없는 하늘, 가보지 못한 별이었다.


너무 취한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금성이 아니라면 커피를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요?"

"금성 커피가 우주 최고잖아요."


그녀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요?"

"금성은 기압이 세고 온도가 높아 커피 원두를 볶기에는 단연 최적의 조건이죠. 당. 연. 히. 커피 맛도 끝내줘요."

"그런가요? 금성에서는 하루에 커피 한 잔만 마시는 건 불가능하겠어요. 하루도 길고, 커피는 맛있고.”


나의 앞뒤 없는 이야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지 못한 나는 술을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녀가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곱실거리는 머리가 하늘거리자 타이탄 하늘빛과 섞여 매혹적이었다. 길고 매끈한 손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비단결 머리카락이 일렁였고 하늘이 빙빙 돌았다. 이대로 밤새도록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음악소리 사이로 내가 소리치듯 물었다.


“리게이아 호수 때문에요. 오렌지 빛 하늘 아래 주홍빛 구름이 떠다니는 비취색이 매혹적인 리게이아 호수 사진을 봤거든요."


내가 본 사진을 그녀도 보았던 것이다. 속아서 여기까지 오다니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게이아(Ligeia)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 물음에 그녀는 춤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녀의 신비로운 눈동자에 홀린 듯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세이렌 중 한 명의 이름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춤추던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저도 그 호수에 가면 파멸되나요?”

“아,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리가이아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자'라는 뜻도 있다는 거예요. 아마 이 타이탄의 호수도 기묘한 소리를 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갑자기 품 안에서 낡은 펜 하나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쪽 손등에 '맑은 소리를 내는 자'라고 적었다.


그제야 나는 아까 보았던 그 문신들이 깨알 같이 적힌 행성어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결 위에 층층이 쌓인 글자들은 마치 그녀가 지나온 우주의 궤적을 기록한 지도 같았다. 잉크가 번진 곳도 있었고, 방금 적은 듯 선명한 검은색도 있었다.


"잊지 않으려고요. 당신이 말해준 그 아름다운 이름의 의미를."


그녀가 씩 웃으며 펜을 멈췄을 때, 그녀의 손등에는 내 목소리가 문장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몸은 누군가와 나눈 대화와 기억을 수집하는 가장 사적인 기록장처럼 보였다.


"지워지지 않나요?"

"물론 지워지죠. 그래서 기억이 흐려질 때쯤 다시 적거나, 아니면 그 기억을 따라 직접 떠나야 해요."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청했다.



느린 턴을 돌 때,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전 호수를 봤어요. 실제가 사진보다 더 아름다웠어요."

"뭐라고요?”

“에메랄드 빛 수면이 파르르 떨렸어요. 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죠. 하마터면 걸어 들어갈 뻔했어요. 마침 맑은 바람이 불어와 멈추었죠.”


그녀가 살짝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진짜 추억에 잠긴 듯한 그 표정에,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나 역시 호수 사진 한 장에 매료되어 이곳 타이탄까지 흘러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게이아 호수는 생명체의 접근이 불가능한 메탄 호수였고, 거리도 여기서 100KM 나 떨어져 있었다. 그곳까지 이동할 수단도 방호복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방금 저 먼 곳의 에메랄드빛을 보고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취기가 확 깨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았다.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 때문에 내게 거짓을 말하는 거죠? 솔직해져요.'


입안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우리는 그 뒤로 더 이상 호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춤도 멈추었다.





금성에서 온 그녀, 내일 3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