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씬으로 읽는 단편영화
외계인
한 통의 편지.
마지막 인사였다.
내 딸 담.
아니야.
담은 내 딸이 아니야.
대본리딩
이 영화는
외계인 담이
지구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그녀의 고향으로 떠나기 전
며칠 동안의
이야기이다,
엄마인 나는
딸이 외계인이란 걸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내 딸
담이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
생김새는 똑같아도.
냉대한다.
그러다 문득문득.
마음 밑바닥에선 딸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래도 이 아이는 분명,
내 딸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씬 13은
담이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걸
알고 난 뒤 지구에서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씬이다.
S#13. INT. 담의 방 – 밤
무화
해가 뜰 때 산 정상에서 기다릴게요.
담이 책과 그림들을 하나씩 펼친다.
어린 시절부터 써 온 일기들과 그려온
그림들 속에는 우주의 형상이 담겨 있다.
담은 바닥에 깔린 쓰레기를
대충 한 곳에 몰아넣고 퍼즐을 맞추듯
그림 조각들을 바닥에 펼치기 시작한다.
Flash back:
INT. 담 엄마 집 - 낮
다가가는 담을 모른 체하며 담을 냉대하는 엄마
<대본 13 씬 중에서>
대본에 쓰인 엄마와의 씬.
이 몇 줄의 씬은
모녀와의 관계를 상징하듯 심플하다.
담의 회상씬이라
엄마의 표정이 잡히지 않을 수
있겠다 싶지만.
나는 그래도 엄마니까.
돌아선 담이의 인기척이
잦아들 무렵,
내심 안쓰러운 표정을 드러낸다.
외계인.
그렇다 이 영화는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다.
촬영한 지 3년.
되돌아보니,
세상의 모든 딸은
엄마에게 외계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각자의 우주를 가져버려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각자의 공간에서
충돌하지 않을 만큼
우주적 거리를 확보한다.
그러기로 타협한다.
그렇게
뱅글뱅글
서로를 공전하는
외
.
계
.
인
.
나는 이 장면을 꽤나 고민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책도 한 권 가져갔다.
앞치마도 챙겼다.
의상도 신경 썼다.
감독과 주고받은 의상리스트에는
대본에 나오지 않는 엄마의 히스토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엄마와 딸의 단절감.
대화 없이 오직 눈빛과
몸짓 만으로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연기를 하면서
자주 생각한다.
영화에서
대사라는 것.
일상에서
대화라는 것.
그 얼마나 크고 놀라운
특혜이고 특권 인가.
그러니
어서 말을 해.
딸은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야
한 통의 편지를
남긴다.
김그린 감독이 직접
꾹꾹 눌러쓴 그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뭉클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엄마와 딸이란 게
이. 런. 건. 가.
정작 중요한 말은
꺼내지 못하고 꺼낸다 한들
엄마인 나는 답장조차
할 수 없게 만든 못된 딸.
머리가 다 큰 아이는
키마저 엄마를 훌쩍 넘을 때쯤.
내 딸 담처럼
자신의 행성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말지.
그저 멀리서 그저 우두커니
맴맴 돌 수밖에 없는
엄마라는 행성.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외계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말다툼이라도 실컷 해 볼 걸.
"엄마가 내 맘을 어떻게 알라,
딸, 너는 왜 그렇게 생겨먹은 거야."
내 딸이었지만 내 딸이 아니었던
담에게
전하지 못한 답장을 쓴다.
담아.
잘 있는 거지.
그렇게
떠나버리지는
말지.
맴맴 돌더라도 그냥 있어 주지.
외계인: Fiction/Color/2022/13'02"
각본/연출:김그린
출연:이예지, 정해령, 장마레
같이 만든 사람들: 이경희, 신지웅, 김서현, 송휘수, 신수형, 라유민, 한규필, 이희성, 김동욱, 정민, 한진섭, 김나연, 홍미경, 강수빈, 박민찬, 박지우
자신만의 행성에서
자존하고 있을.
그리고 자신만의 꿈을 따라
공전하고 있을
김그린 감독의
영화로운 시절을
응원합니다.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100명의 마레가 산다'
수요일은 장마레의 브런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