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박이 고추장찌개와 감자볶음
오랜만의 인터뷰였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회사는 아니었는데 막상 인터뷰 일자가 다가올수록 그 회사에 가야만 하는 쓸데없는 이유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준비를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다. 경력직 인터뷰인 만큼 기존 업무들, 했던 일, 회사에 대한 질문이 중심이기에 '내가 뭘 했었더라'라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그 회사와 관련된 최근 기사들부터 그 회사의 방향성을 엿볼만한 인터뷰 자료들, 고객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그 회사에 대한 정보들은 찾아보았다. 워낙 조직문화나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회사였고, 요즘 가장 뜨거운 회사답게 이 회사 명함에 이름 찍는다는 것의 제법 의미가 있어 보였다.
가는 길은 험했다. 서울의 서쪽 끝 즈음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부터 서울의 동쪽 끝 즈음에 위치한 그 회사까지는 한 번의 버스, 두 번의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15분 정도 넋 놓고 향해야 했다. 의도치 않게 기다려졌던 인터뷰여서 그랬을까,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회사 근처를 서성이며 이 회사를 다니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들에게 이 회사는 무슨 의미일까.'
잦은 이직, 짧은 경력. 나는 지금 매우 애매한 커리어를 갖고 있다. 커리어도 애매한데 회사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상사의 업무지시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입술은 튀어나오고 이마에는 내 천 자가 짙게 드리워지는 이 철딱서니 없는 성격을 어떡할까. 쓸데없는 자존심은 만리장성이라 회사가 외부업체에게 갑질을 하거나 양아치 짓 하는 것을 보면 분노에 사로잡혀 몇 날 며칠 이 회사에 다닌다는 것이 부끄럽다며 부들부들 떨었다. 맘에 없는 소리는 콧방귀로도 못 나오니 다들 눈치 보는 회사의 비선실세 권력 앞에서도 내 할 말은 해야만 했다. 회사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갑질을 하려 하면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큰소리치며 퇴사 선언을 하기 일쑤. 난 어디서부터 이렇게 문제인 걸까. 핏속에 회사부적응 DNA라도 박혀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한 곳에서 오래 다니고 싶다. 같은 사람들과 오래오래 의기투합하며 서로를 토닥이고 익숙한 내 책상에서 익숙한 내 공간에서 옮길 때마다 적응해야 하고 옮길 때마다 사람들 이름 외워야 할 필요 없이, 3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한 회사에 있고 싶다, 나도.
요즘 다들 설레발치며 꿈의 직장이라 자칭 타칭 말하는 이 회사는 그래도 무언가 다를까? 나도 모르게 인터뷰 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기대라는 무게가 1kg씩 더해지고 있었다.
"경력직 인터뷰는 처음이 아니실 테니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아, 네네"
"전 회사는 왜 나오셨죠?"
언제나 따라다니는 퇴사사유. 묻지 않을 리가 없었고 말하기를 피할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나에게는 나름의 분명한 이유였지만 이전 회사의 사적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말하기도 어렵고, 계집애들의 기집질로만 보일 것이 뻔하니 있는 사실 속에서 숨길 것은 숨기며 말을 요리조리 피해서 내 카드를 꺼내보자.
"네네~ 여기 오셔서 뭘 하고 싶으세요?"
"아 저는 이 회사에 입사해서"
반응은 시 언짢지만 우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 것 같다. 내 앞에 앉아서 독침을 날려대는 이 아저씨는 내가 지망한 부서의 총괄이란다. 빈대같이 생겨서 질문들이 차갑고 아팠다. 괜찮아 괜찮아, 붉어지려는 얼굴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해본다.
"알겠고요, 그럼 이런 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꾸 말을 끊는다. 내 말이 지루한가, 당황스럽다. 나름 압박면접 스타일로 하려나보다. 듣기만 했던 압박면접이지 경험으로는 처음이다. 당황하지 말자, 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자.
"네네, 1억을 드린다면 뭘 하시겠어요?"
광고회사 다닐 때는 콧방귀도 안치던 금액이지만 스타트업으로 옮긴 이후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예산이다.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내 숨소리가 커진 것 같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기분이다. 안 그래도 어색한 표정이 더 어색해지고 있다. 망했다.
망했다.
그렇게
깨끗이
망했다.
인터뷰는 45분 정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15분뿐이니 말 다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가 던지는 질문이나 표정, 반응들을 보면 '오케이, 느낌이 좋아.' 사이즈가 나오는데 이건 제대로 망했다. 너무 망해서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휙휙 젓다가 대체 뭘 먹으려고 내가 밥에 물을 말았지 하고 멍 때리는 수준이었다.
'허허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터뷰 방에서 나왔다. 머리는 띵했고 스트레스를 고농축으로 압축하여 만든 알약을 한 움큼 삼킨 기분이었다. 어서 집에 가자, 그만 집에 가자, 그만 돌아가자.
오는 길만큼이나 가는 길은 멀었고
올 때의 설렘은 모두 사라지고
갈 때는 참담한 심정뿐이었다.
병신 같은 대답뿐이었고,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찬 허무맹랑한 답변이었다. 그래, 그랬다 치자. 그럼 나는 왜 거기에 반격해서 너네 회사의 문제와 왜 내가 필요할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지 못했는가. 날카로운 질문 던지기가 필살기인 나란 사람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그 회사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렇게 그 작은 방에서 남자 둘 앞에서 위축됐어야 했는가. 병신 같은 나였다. 나는 병신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멀고도 먼 그 길 내내 머리는 아팠고 속은 울렁거렸고 내가 미련했고 부끄러웠다. 조그마한 계집애와 45분을 인터뷰한 두 아저씨는 퇴근길에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내 답변도 기억 안 난다며 '걔 참 병신 같았어'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병신 같은 내가 더 병신이 될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줘야 하나 싶었다. 이불속에 파고 들어가 '아휴 이 병신아'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오늘의 나는 참 별로였다. 정말 별로였다.
'밥이나 먹자.'
배는 또 쓸데없이 고파온다. 신랑은 오늘 늦는다니 어차피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었다. 뭘 시킬까, 돈이 없네. 뭘 사갈까, 지금 인터뷰도 망하고 왔는데 그럴 돈이 있냐. 또 스스로를 자책해본다. 이런 생각을 주절주절 머릿속에 나열하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
'밥을 하자.'
무슨 결심도 아니고 그냥 요리를 하고 싶었다. 망한 것 투성이인 오늘의 유일한 완성작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먹고 싶다 생각이 들었던 감자 양파볶음과 냉장고 속 차돌박이로 끓이는 고추장찌개. 감자를 썰고 찌개를 끓이다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다. 병신 같은 나를 위해 밥을 차려 주기로 했다.
귀찮지만 반찬을 그릇에 담고, 찌개도 예쁘게 끓이고, 밥도 예쁘게 담고. 병신 같은 나를 위해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병신같이 구느라 고생했다. 오늘 하루, 병신이 돼버리느라 고생했어. 근데, 너 괜찮아. 너도 잘하는 게 있어. 너도 필요하다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걸,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넌 할 줄 알잖아. 남들이 잘하는 거 같이 잘하지 못해도 남들이 못하는 거 그런 건 잘하잖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잖아.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 아니야. 아직 내 자리를 찾지 못해서 그래. 지금까지 있었던 곳은 네 자리가 아니었을 뿐이야. 네가 했던 선택들은 결국 최선이었는걸. 알잖아, 우리한테 옵션은 없었단 걸.
밥을 다 먹고 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오늘만이 아니었다. 요즘의 나는 참 별로다. 아마도 앞으로 얼마간은 이렇게 별로일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인 인생은 아니니까. 요즘의 내가 별로일 뿐이지, 그렇다고 인생마저 별로인 것은 아니니까.
그저 이 별로인 시간이 어서 지나기를 바랄 뿐.
다 지나갈 것이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