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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Apr 18. 2022

5월의 고향에서

할머니, 나의 어린 시절, 이 아름다운 마을에게 안녕을

이모를 보고 나오는 길, 외할머니 집이 있던 산동네에도 가보고 싶단 마음이 일었다. 바닷마을과 더불어 유년을 반짝거리게 채워준 곳, 문득 그곳의 지금이 궁금해졌다. 굽이진 길을 오르고, 묻고 또 물어 도착한 산만디에는 새소리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흩트려놓았다. 마을로 들어서자 멀리서 울려 퍼지던 라디오 소리가 가까워졌고 이는 꽤 다정하게 옛 시간을 불러내주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눈에 밟히는 꽃마리, 지천에 피어난 작은 들꽃을 보며 환호를 질렀다. 나아가지를 못하고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보며 엄마는 어리둥절해했다. 수목원에서, 제주에서 한 포기씩 만나곤 했던 이 꽃을 보면 도대체 왜 그리 익숙한지, 이게 무어라고 자꾸 마음이 쓰이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5월의 고향에서 답을 찾았다. 무의식에 남은 흔적들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풍요로운 마음에 행복이 뒤따른다.


 마을의 첫 집, 버스정류장 앞에서 소를 키우던 세진이네 할아버지 집은 그대로다. 소똥 냄새는 참을 수 없어 한 손으로는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론 여물을 주었더랬지, 키우던 개 아롱이가 죽었을 때, 끓여서 세진이네 소 줬다던 할머니 말에 학교 갈 때마다 울음보가 터졌던 외양간. 이제 소는 없고 작은 마당엔 하얀색 승용차가 들어와 있었다. 세진이도 내 나이가 되었겠구나 하며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오랜 벗의 애띈 얼굴을 떠올려본다. 다음 집은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던 할머니 집, 덕동댁이라 했었나? 진흙으로 지은 오랜 집은 손길이 닿지 않은지 꽤 되어 보였지만 텃밭에는 딸기꽃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올챙이 잡으러 도롱뇽 잡으러 뛰어내리곤 했던 둑 아래 냇가에는 땅을 메웠는지 폭이 좁아져있지만, 아직도 그대로인 큰 바위 아래 웅덩이엔 올챙이가 와글와글하다.

‘하여간 나갔다 오면 꽃을 한 줌씩 꺾어오고, 바가지란 바가지마다 올챙이, 국자란 국자마다 뽑기. 아무튼 사부작사부작 잘 놀았다캤다.’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 속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닮아있어 한바탕 웃기도 하며 우리는 계속 걸었다.


마을의 끝집, 김해댁이라 불리던 우리 외할머니 집터에는 냇물을 메우고 지대를 높여 멋진 집이 들어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해 학교도 못 가곤 했는데, 이제는 물이 줄어 다리도 사라지고 옛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지만, 새로운 주인이 밭을 일구는 모습도, 정원을 가꾼 모습도 활기차 보여 기뻤다. 열 가구 남짓한 이 동네가 사라지지 않은 것도 감사한데 할머니 집터까지 멀쩡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엄마도 폐허로 남지 않아 안심이라며 참 좋아하신다. 할머니 집을 지나 뒷산으로 가는 길, 매달려 놀던 고목도 그대로, 동네의 유일한 미끄럼틀 큰 무덤도 여전하다.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을 더듬으며 염소 풀 멕이러 몰고 가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이나 걸었다. 많은 게 낮아지고 작아졌지만 기억 속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정겨운 산책.


 걷다 보니 산허리 과수원에 다다른 발걸음. 새하얀 꽃이 한창인 사과나무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여기 사과를 먹으며 매년 추억하자고 다짐했다. 전쟁이 나도 모르겠다 싶은 고요한 마을, 어쩌다 이 산골까지 올라오게 됐는지 할머니의 삶을 가늠해 보고, 딱 내 나이 때 엄마의 고단함도 헤아려보던 시간. 마침 빈차로 올라온 버스는 우리가 타길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떠나고, 손녀가 지애미 손 붙잡고 이 버스에 오를 때마다 툇마루에 서서 이곳을 향해 한참을 손 흔들던 할머니가 생각나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할머니가 고마워 할머니가 그리워, 그 시절이 내게는 너무도 아름답게 남아있는데 한편으로는 지금과 너무도 닮아있어 안온해지던 시간. 엄마 품에 안겨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할머니를, 나의 어린 시절을, 이 아름다운 마을에게 인사를 건넸다. 따스한 나의 유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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