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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Jul 22. 2022

지금 여기를 이루는 조각들

지금 이 평온을 이루는 요소들을 기록해 봐

“요즘 어때?”

지인들은 종종 물어온다. 요즘 어떠냐고. 지난날 내가 그리 불안해 보였던 걸까? 대답 전에 항상 따라붙는 생각이다. 과거의 불안정했던 내 모습이 함께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잠시 상대의 눈을 피해 허공을 올려다본다. 한 템포 쉬고 이어지는 대답은 한결같다. 좋아요. 편안해요. 힘들 땐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니,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일이 드물기도 하지만 말은 그리해도 나의 평온함은 언제나 불안하다. 내뱉고도 아차,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하며 후회할 때도 많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이 내 손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는 귀신같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랄까. 그럼 뒤따르는 건 시련이다. 물론 견뎌낼 만큼의 것이 찾아오고 나를 딱 고만큼, 단단해지도록 만드는 것들 말이다. 아이가 코감기에 걸린다던가, 아이가 나을 즈음엔 남편이 목감기에 걸린다던가, 아님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를 내가 앓는다던가. 그럴 때면 경솔했던 자신을 꾸짖기도 하고, 어디 입력값이라도 정해져 있나 싶어 신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평온을 이루는 요소들을 기록해 봐”

고작 30년을 살아온 내가 제주에 와 사는 한 해 동안 30년 치 어른의 맛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 한동안 나는 그를 스승이라 부르며 따랐고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 몇 해만에 만난 그는 남들과 달리,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이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평온을 이루는 요소들을 기록해 봐.”

 이 말이 종일 아니 며칠을 귓가에 머물렀다. 한없이 미숙한 내가 스승을 만남으로써 그나마 몇 계단 오르내리기라도 해 봤다면 설명이 될까. 그는 내게 그런 존재이다. 그를 알기 전부터 읽어온 그의 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사리 내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저기 콕콕 박힌다. 날카로운 말에 찔릴 때면 ‘자기가 도대체 뭐라고 잔소리야‘ 싶다가도, 상처는 이내 아무니까, 아물어 딱지가 앉고 흉이 될 즈음엔 나 스스로 조금 더 깊어졌음을 느끼곤 했다. 한동안 뵌 적이 없어 그런가. 요즘 종종 드는 생각은 아이 낳기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미숙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성숙에 고통은 불가피하다지만, 고통은 곧잘 찾아오는데 반해 무엇하나 곱씹고 되새길 여유도, 질질 끌어 바닥까지 잡아당겨볼 힘도 없는 요즘의 나날들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러므로 마음은 또 평온한 게 아닌가 싶고.


요가 / 깊은 호흡 / 맑은 눈동자 / 건강하게 조리한 음식 / 맑은 날 햇살/ 정원을 돌보는 것 / 함께 일하는 동료/ 멍 때리기 / 30분 근력운동 / 아이와 반신욕 / 혼자만의 시간 / 세 식구의 일요일 / 엄마의 밝은 목소리 / 아이의 노랫소리 / 꽃

챙겨 다니는 노트에 적어두었다. 바람은 언제나 불어올 테니까 그때마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지금은 잠잠하니까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머물러있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크게 행복한 날에는 마음속에서 작은 불안이 항상 고개를 쳐든다. 마치 ‘이제 내가 나갈 차례인가?’ 하며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며칠 전 남편과 아이, 나 셋이서 밤 산책을 다녀왔다. 가볍게 바닷길을 따라 달리며 밤바다만 보려 했으나 휘영청 뜬 달이 너무도 밝아 달빛 샤워를 마다할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아이와 남편이 앞서 걷고 나는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잔잔한 행복이었다. 잔디정원이 나타나자 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다. 그곳에선 아이들 뿐만 아니라 동네 어르신까지도 모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가장 어렸지만, 단무지니 깍두기니 하며 혼자 신이 나 뛰어다니는 아이를 모두 사랑스럽게 봐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달콤해 달님을 우러러 감사하다며 찡긋 웃어 보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남편과 나는 친구들의 놀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까지 물러나 그저 바라보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모두 멈췄는데 여전히 뛰어다니는 우리 아이가 우리 눈에만 이쁜 게 아니었나 보다. 한 친구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아이를 안아 들었는데 빠져나오랴 발버둥 치던 아이는 그대로 떨어져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앙-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눈물에 묻어 나오는 코피와 함께 잔잔한 행복은 흘러갔다. 꽤나 아팠는지 신경질적으로 돌변한 아이를 마주하며 힐끗 달님을 올려다봤다. ‘거참 야속도 하지’ 집에 오는 내내 울어대는 아이에게 시달린 우리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동시에 내뱉은 말은 “아 그러니까 잘 노는 애를 왜 안아가지고!!”

뱉어놓고 서로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절대 남 탓하지 말자며 함께 다짐한 게 불과 삼십 분 전이었기에.


또 하루는 주차 중에 돌담에 부딪혀 타이어가 찢어졌다. 펑크가 나서 바람이 솔솔 새는 것도 아니고 찢어진 틈으로 바람이 순식간에 다 빠져 앞부분이 내려앉아버렸다. 하- 어이가 없었다. 뽑은 지 일 년도 안된 새 차에 펑크를 때우는 것만도 모자라 타이어를 교체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그래 오늘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했어, 이러다 사고 나는 데 조심해야 하는데..’ 하며 긴장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나 마지막에 긴장의 끈을 잠시 풀어버릴 즈음 이런 사고가 난 거다. 이만하면 다행이다, 큰 사고 안 난 게 어디야 하며 흘려보냈다. 그리고서 집에 왔는데 보일러가 안된다. 방은 뜨끈뜨끈한데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아이를 씻길 수도 우리가 씻을 수도 없는 거다. 한여름에 방은 절절 끓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 씻고 싶은 마음에 찬물로 씻었더니 그만 감기에 걸렸다. 하- 한겨울에 냉동실 같은 방에서 잠자는 거 아닌 게 어디냐며 애써 위로했다. 그러고 시계를 봤는데 시계가 두시에서 멈춰있다. 시계 약을 교체하고 보일러를 고치러 기사님 도착, 보일러를 고치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걸 확인한 순간 전기가 나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쯤 되면 의심을 안 해볼 수 없다. 누구 하나 밖에서 재수 옴 붙어 들어왔거나, 아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함이거나, 또다시 갖은 남 탓을 해본다. ‘그러게 보일러 기사님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전기는 왜 건드려서는!!’ 열받아서 화장실 청소를 미친 듯이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렇게 쉬불쉬불거리며 청소를 하고 땀을 빼도 뜨뜻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 그 기대에 찬 샤워를 하며 생각하던 때 전기가 다시 돌아왔다.


나 또한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노트에 써 내려간 조각들에 허세가 깃들었음을 깨닫는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하나도 적어두지 않았잖아! 하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평온을 위한 조각들을 다시 끄적여본다.

배고프면 먹을 수 있는 밥과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
추울 땐 따뜻하고, 더우면 시원한 곳에서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우리 집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의 건강
사랑하는 이들의 존재와 건강
밥 벌어먹고 살게 해 주는 일터
여기에 찾아와 주는 사람들
그리고 머무는 여기, 건강한 지구

지금의 평온을 이루는 요소들, 쓰고 보니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닌 이 단순하고도 작은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 여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감사한 것들 속에 파묻혀 사는 나날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온 이들의 말도 모두 비슷했다. 걷고 걷다 보면 결국, ‘오늘은 얼마나 걷지?‘ 하며 시작된 발걸음이 ’저녁엔 뭘 먹지?‘ 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고, 도착해서는 시원한 맥주, 양말과 옷가지 빨래, 그리고 ’내일 아침엔 뭘 먹지?’ 와 같은 단순한 일상과 물음만이 남게 되는데 이게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우리 모두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자꾸만 산티아고를 열망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게 했던 이야기들. 스승의 그 말도 결국 여기로 닿게 하기 위함이었을까-


뒤에 써 내려간 단순한 조각들이 밥이라면, 먼저 적어 내린 조각들은 나물들. 함께 버무리면 더 맛있으나 무엇 하나, 특히 밥이 빠져버리면 맛과 건강의 밸런스가 무너져내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 그러니 모두 내게 필요하고 소중한 조각들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정성껏 밥을 짓고 성실하게 나물들을 볶아 버무리련다, 내일도 매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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