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억
정민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그가 태어난 1960년대는 전후(戰後) 경제적 발전과 성장을 거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의 태동기라고 불렸으며,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굵직한 사건들이 국내외에 걸쳐 발생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과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앉히기 위해 전방위적인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은 거리로 나왔고,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4월 19일에 이르자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혁명은 절정을 이루었고, 결국 하야를 선언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기붕은 가족 동반 자살을 택했으며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 정변이 일어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장기 집권과 군사독재라는 사슬에 묶이고 말았다.
국제 정세 역시 요동쳤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시도하자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인류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선 미국과 소련이 극적으로 타협을 이루어 핵전쟁 발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게 되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대한민국 또한 각종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파병을 단행하였다. 무엇보다 1960년대는 미소 양국의 우주 경쟁이 치열했는데, 미국은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하여 우위를 선점하였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정민과 정민이 태어난 고향 사람들은 이러한 격동기에 살고 있었지만, 정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달나라에는 왜 가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오직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했다.
정민의 고향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강 하구 산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해에서 강을 따라 올라온 배들이 각종 해산물을 나루터에 내렸다. 강둑 너머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가을이면 황금물결이 넘실댔다. 마을 한쪽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작은 산이 솟아있었는데 꼭대기에 올라서면 고풍스러운 정자가 있고 사방으로 멀리까지 내려다보였다.
읍내에 있는 정민의 집은 대청마루와 너른 마당이라는 비교 불가의 두 가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대청마루에 누워있으면 앞뒤로 불어오는 바람에 더울 틈이 없었고, 저녁이면 그곳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여름에는 커다란 모기장을 치고 방 대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정민의 부모님은 서리 맞아 노래진 감을 따서 대청마루에 쌓아 두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보따리씩 나누어 주었다.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풍경은 계절마다 달랐다. 어떤 날은 처마에서 댓돌 끝으로 굵은 빗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졌고, 또 어떤 날은 손바닥만 한 함박눈이 내려와 발목 높이만큼 쌓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머니가 대청마루 끝에 앉아 석유풍로 켜놓고 부침개를 부쳤다. 식구들이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하게 해 놓으셨고, 정민은 온종일 고망쥐처럼 들락거리며 부침개를 먹었다. 밤새 눈이 내린 날 새벽 무렵이면 아버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에 이르는 길을 내어 놓았고, 이어서 형들이 쌓인 눈을 치웠다. 그렇게 눈이 모이면 그 둔덕은 정민의 미끄럼틀이 되었다.
마당은 작은 운동장에 견줄만한 크기였다. 마당을 둘러싼 울타리를 따라 감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석류나무 등속에 하얗거나 빨간 꽃이 피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가 정겨웠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매미가 울어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리쬐는 햇볕은 그 모든 것을 지나 마당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수확 철이 되면 마당에 볏가리가 높이 쌓였고, 시끄러운 소음과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탈곡기가 돌아갔다. 마당 한쪽으로 수확한 벼를 담은 가마니들이 가득 쌓이고, 반대쪽으로는 알갱이를 잃은 볏짚 단이 하늘을 가렸다.
정민의 생애 첫 번째 기억은 까까머리이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모두가 까까머리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의 머리는 박박 밀려 있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밀어놓은 민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북북 문대면서 애정 표현을 했다. 무엇보다 겨울이면 머리가 시려워 더 추웠다. 돈도 없고 이발소 또한 없었지만, 무엇보다 머릿니 퇴치 같은 위생적인 이유가 컸다.
마당 한쪽에 등받이 없는 둥근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흰색 보자기로 목 아래를 둘러싸고 있으면 아버지가 바리깡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밀었다. 절삭력이 떨어지는 낡은 기계 탓에 머리카락이 쥐어뜯길 때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정민이 처음으로 이발소에 가본 것은 그로부터 무려 십여 년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스포츠머리'가 얼마나 스타일리시하고 자랑스럽던지!
낮 동안 정민의 집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당시 대부분 가구가 그랬듯이 형과 누나들은 학교에 갔고, 부모님은 논과 밭으로 일하러 나가셨다. 막내인 까까머리 정민은 어쩔 수 없이 대청마루와 마당을 오가며 혼자 놀아야 했다. 그러던 정민에게 하루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요새는 36도가 보통인 날씨가 되었지만, 그때는 수은주가 26도를 넘으면 드물게 더운 날에 속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정민의 까까머리를 태울 듯 작렬하였다. 어디까지가 머리이고 어디부터가 얼굴인지 잘 구분되지는 않았으나 정수리부터 송골송골 솟은 땀방울은 쉼 없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정민은 그날도 세발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누볐다. 극한 날씨에도 정민의 자가용은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원통형 건전지를 저만치 굴린 다음, 자전거 페달을 밟아 그것을 쫓았고, 마침내 구르는 건전지를 따라잡아 손으로 낚아채면 승리하는 놀이었다.
정민의 자전거는 요새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와 모양이 좀 달랐다. 안장은 쿠션이 없어서 딱딱했다. 자전거가 덜컥거리기라도 하면 꼬리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고급 자전거의 상징이던 경적 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는 없었으며, 손잡이 끝에 멋들어진 수술 장식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뼈대와 바퀴 세 개만 달랑 달려 있었다. 칠은 거의 벗겨져 원래 그 자전거가 빨간색이었다는 것을 남아있는 페인트 흔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비록 그 자전거의 외형과 구성은 볼품없었으나 정민의 유일한 놀이 기구이자 껌딱지 친구였다. 게다가 동네를 통틀어 그런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몇이 되지 않았다. 정민의 집이 부자라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꼬마 정민을 위해 어디선가 애써 구해 오신 거였다. 말하자면 그 세발자전거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건전지와 쫓고 쫓기는 경주를 무한 반복하던 정민은 드디어 그날의 마지막 승부를 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건전지를 있는 힘껏 던졌다. 그리고 멀리 시야 끝에 보이는 놈을 추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건전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정민의 눈앞에 무언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전복되었고 땅바닥에 처박힌 정민의 눈앞에는 별이 아른거렸다. 건전지 체포율 100%와 그동안 무사고 운전을 자랑하던 정민은 망연자실했다.
마당에 큰 대자로 엎어져 있던 정민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팔다리를 살펴보았으나 다친 곳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부서진 화분 조각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흙더미, 마구 꺾여버린 꽃. 마당 한쪽에 화분들이 삼단 거치대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정민의 자전거가 그곳으로 돌진한 것이다.
정민은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가 정성을 기울여서 기르는 화초들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도 잠시, 머리 쪽으로 자꾸 손이 가는 게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정체 모를 공포가 훅 밀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를 감싸 쥐고 울고 있는 정민을 학교에서 돌아온 누나가 발견했다. 정민의 머리를 정신없이 살피던 누나는 정민의 까까머리에 박힌 수많은 선인장 가시를 발견했다. 그 많은 종류의 화분 중에서 하필이면 유난히 가시가 많고 키가 1m가 넘는 라이언금 선인장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다행히 마당을 구르는 건전지를 쳐다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에 가시가 박히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누나는 울고 있는 정민을 달래 가며 침착하게 가시를 뽑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수의 가시들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결국, 저녁내 온 식구가 달려들어 그의 머리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아내느라 한바탕 난리 법석을 겪었다.
물론 파손된 여러 개의 화분과 부러진 삼단 거치대에 관해서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은 정민이 잠들 때까지 식구들이 교대로 와서 정민의 작은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까까머리 정민이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일으킨 '대형 사고'는 그렇게 가족들의 도움으로 수습되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정민은 지금도 선인장을 보면 경계심이 앞서고,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한걸음 물러서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