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골목 전쟁
국민학교 입학하는 날, 까까머리 정민은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았다. 지금은 사라진 문화이지만 신입생이라는 표식과 불시에 흐르는 콧물을 닦는 용도였다. 학교 운동장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로 가득했다. 아이들 손을 잡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같이 그저 담담한 얼굴이었다.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정민에게는 같은 까까머리를 하고 비슷한 키에 별다를 게 없는 옷차림을 한 또래 친구들이 생겼다. 그곳은 집과 가족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였다. 국민교육 헌장이나 구구단을 누구보다 빨리 외우는 정민을 보며 아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교성이 풍부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는 애티튜드에 자연스럽게 정민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였다.
정민이 한글을 배우며 새로 사귄 친구들과 땅따먹기와 비석 치기 놀이에 폭 빠져 있을 때, 대한민국은 높은 교육열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경기중-경기고-서울대' 출신을 ‘KS 마크’라고 불렀는데, 이 과정을 통과하면 정관계는 물론 재계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요직이 보장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흐름은 능력 있는(?) 부모들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과열 현상은 1964년 12월 치러진 서울시 중학교 입시에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공식적인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였다. 그러나 2번 ‘무즙’을 답으로 고른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무즙을 넣어도 엿이 만들어졌고 무즙에는 디아스타제가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2번도 정답이 될 수 있었다.
교육 당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정답을 2번으로 고른 학생들의 부모들이 들고일어나 서울시와 교육 당국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공신력이 바닥까지 추락했음은 물론이다. 이 문제는 소송으로 이어졌고 결국 1965년 고등법원이 이를 인정했으나 2년 후에나 추가 입학이 이루어졌다. 이 틈을 이용한 일부 고위층의 자녀 끼워 넣기 입시 비리가 판을 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1969년 이후 중학교 입학시험은 전면 폐지되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대변하듯, 공부를 잘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그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만약 앞서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정민은 KS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시골 아이' 정민에게 그런 정보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KS가 뭔지 알지 못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3년 기준 국내 초중고 학생 5명 중 4명이 사교육에 참여했고, 서울 학생 1인당 사교육비 지출이 월 74만 원, 특히 강남구는 월 140만 원이라고 한다. 가히 등골 브레이커라 할 수 있다. 과거에도 우골탑이라는 말이 있었다. 재산목록 1호이자 농사짓기의 핵심 동력인 소를 팔아 자녀를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 보낸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어차피 정민의 고향 마을에는 소가 있는 집조차 없었지만.
정민이 살던 마을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강둑을 경계 삼아 지리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아랫동네는 강둑 안쪽 나루터가 생활의 중심이었다. 서해 인근 군성에서 출발한 커다란 배들이 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새우젓을 비롯한 각종 해산물을 내리면 그것들을 가공하여 유통하거나 재료로 삼아 식당을 운영했다. 윗동네는 읍내에 형성되어 있었다. 법원, 경찰서, 읍사무소 등 관청과 학교, 교회들이 있었고 외곽으로 나가면 넓은 평야 지대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정민의 집은 윗동네에 있었고 정민은 동네 아이들의 골목대장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러하듯 정민에게는 만만치 않은 라이벌이 있었다. 아랫동네 태성이었다. 태성의 부모님은 나루터 근처에서 식당을 했고 농사를 짓는 정민의 집보다 부유했다. 그 친구는 해산물을 날것으로 많이 먹은 탓인지 간디스토마에 감염돼 얼굴이 늘 흙빛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몸이 날랬고 용돈으로 받은 돈이 많아 아랫동네 짱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 둘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늘 경쟁을 일삼았다. 그들만의 세상을 차지하기 위한 아이들의 골목 전쟁이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대결은 주로 중립 지역인 학교 운동장과 삼거리 구멍가게 앞 너른 공터에서 벌어졌다. 물론 상호 협의로 가끔은 상대 구역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정민과 태성을 필두로 한 무리가 대결을 펼치는 종목은 딱지와 구슬 그리고 축구였다. 출전 선수는 종목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는데 대장들이 선발을 정했다. 집집에,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쳤으므로 인원 조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태성은 용돈을 투자하여 구슬을 새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구슬이 많았고, 정민은 달력을 뜯어서 만든 딱지의 보유 수가 많았다. 재고 관리는 대장들이 했고, 가끔 현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보유 자산의 내용을 공유했다. 딱지나 구슬은 어떤 날은 잃고 어떤 날은 따기도 했기에 자산 총량에 큰 변동이 없었다. 따라서 주로 승부는 축구에서 결판이 났다.
아이들은 변변한 운동화조차 신지 못하고 맨땅인 운동장을 뛰어다녀야 했지만, 규칙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여 엄격하게 룰에 따랐다. 양 진영에서 교대로 심판을 정해 운용했고, 심판의 판정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축구 경기에서는 태성의 아랫동네 승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단백질 섭취량이 많았던 그들이 피지컬에서 윗동네를 압도했다. 아랫동네에 패배한 날이면 정민은 구석에 혼자 처박혀 분함을 삭여야 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어느 날, 감독 겸 중앙 미드필더로 열심히 뛰어다니던 정민이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시계가 없어 경기 시간 측정이 어려운 관계로 보통은 먼저 3골을 선취한 팀이 해당 게임에서 승리하는 걸로 규칙을 정했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민의 윗동네가 먼저 2득점을 했고 남은 한 골을 넣고자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던 순간 드디어 정민에게 찬스가 왔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길게 넘어온 공이 정민의 발에 닿았고, 두세 번 치고 나가자 골키퍼와 1대 1 상황이 되었다. 이대로 녀석을 제치고 골을 넣으면 윗동네는 오랜만에 대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돌변하였다. 드리블하며 골문으로 접근하는 정민과 달려나오는 골키퍼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정확히는 녀석이 달려와 들이박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불행히도 놈은 상대 팀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다.
정민은 그 자리에 쓰러져 코피를 한 사발은 족히 쏟았다. 코가 주먹만 하게 붓고 코피가 멈추지 않는 걸로 보아 코뼈의 미세 골절까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병원을 갈 수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누가 다쳤어도 그랬을 거니까. 식구들에게 부상을 들킬까 봐 어두워진 다음에 집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정민의 코에 관심이 없었다. 그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정민의 코뼈는 왼쪽으로 살짝 휘어있다. 만성 비염과 감기가 오면 무조건 코부터 시작하는 증상은 아마도 그때의 부상이 한 원인일 것이다.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치열한 교전을 멈추고 무조건 휴전을 하는 날이 있었다. 주말 저녁 해질 무렵이면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치과에 모였다. 말이 치과이지 간판도 없이 무허가로 치과 시술을 하는, '김 원장'으로 불리는 아저씨 집이었다. 그 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었다. 금성사에서 만든 다리가 달린 19인치 흑백 TV였다.
김 원장 아저씨는 높은 마루에 TV를 꺼내 놓았고 아이들은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서 또는 마당에 둘러선 채로 눈이 빠지라고 TV를 쳐다보았다. 당시 '서부 소년 차돌이'와 '마징가 Z'는 아이들의 최 애 프로그램이었다. 최불암 주연의 '수사반장'이 방송될 시간이 되면 동네 어른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머니의 야단에도 정민은 수사반장을 보기 위하여 저녁을 거르는 때가 많았다. 드라마에서 박영한 반장이 매번 범인을 당구장에서 잡는 장면을 보고 정민은 절대 당구를 배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치과 TV 단체 관람객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네에 만홧가게가 생기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이 만홧가게의 TV는 치과보다 훨씬 큰 화면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스토리 파악이 쉬웠다. 1971년부터 대통령 컵 쟁탈 국제축구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는데 만홧가게에 모여 요즘의 거리 응원 비슷한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 만홧가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 10원이 필요했다. 10원이면 무제한으로 만화를 볼 수 있었는데, 한 번 나가면 무효이기 때문에 화장실을 참아가며 악착같이 앉아 있었다. 정민에게는 늘 10원이 없었고, 부모님 역시 정민에게 만홧가게 가라고 돈을 줄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정민은 그럴 때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작은 엄마를 찾아갔다. 작은 엄마는 정민을 아주 예뻐했으며 선뜻 10원짜리 지폐를 내주었다. 부모님께서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지만 별다른 제제가 따르지는 않았다. 다만, 한동안 어른들 사이에서 정민의 별명이 '10원짜리'가 되었다.
정민의 마을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기차역이 있었다. 이 역을 지나면서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지기 때문에 교통량이 많고 꽤 큰 규모였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아이들은 싸움을 멈추고 모두가 기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명절을 맞이하여 귀성하는 가족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정민도 당연히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정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은 큰누나였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던 누나를 몇 날이고, 몇 시간이고 기차역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인가 마침내 누나가 도착하였고, 누나의 양손에는 선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정민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축구공이었는데, 누나가 사다 주는 축구공은 아이들 사이에서 정민이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었다. 작은 누나는 인형과 과자가 들어있는 '종합선물 세트' 상자를 며칠이고 껴안고 다녔다. 그 상자 안에는 평소 구경해 보지 못했던 달콤하고 짭짤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단연코 설탕을 가장 좋아하셨다. 백설표 설탕이라고 적혀있는 비닐봉지 안에 담겨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가루는 저게 먹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당시에는 단맛을 내는 재료로 거의 모든 가정에서 '뉴슈가'를 사용했다. 설탕이 비싸고 귀했던 시절에 널리 유통되던 이 대용 제품은 사카린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이 사카린을 둘러싸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1960년대 부산항에서는 폭리가 보증되는 밀수가 성행하였다. 부산세관이 이들 물품의 통관을 담당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1966년 5월 엄청난 양의 수상한 포대 자루들이 부산세관에 의해 적발되었다.
조사 결과 ‘한○ 비료’가 몰래 들여온 사카린 원료였다. 이를 비료 공장 준공을 위한 자재로 둔갑시켜 세관을 통과한 뒤 국내에 유통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두 하역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나르는 포대가 사카린 원료라는 것을 알고 일부를 빼돌리려다 들통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 비료는 삼○의 계열사였다. 해방 전부터 비료 공장은 흥남을 중심으로 이북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분단 이후 남한은 줄곧 비료가 부족했고 이는 식량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삼○그룹의 이병○ 회장에게 비료 공장 건립을 제안했고 각종 특혜를 반대급부로 삼○이 만든 회사가 한국 비료였다.
적당히 덮으려던 이 사건은 모 일간지의 폭로로 세상에 드러났다. 밀수 행위를 국내 굴지의 재벌이 주도했다는 점과 생활필수품인 사카린이 대상이었다는 점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삼○ 그룹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 비료 완공 후 국가에 헌납할 것과 이병○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겠다는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대미문의 밀수 사건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정민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뉴슈가를 넣어 옥수수를 삶았고, 아이들은 뉴슈가를 넣어 만든 단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 제법 소년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정민의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였던 태성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언젠가부터 얼굴을 볼 수가 없었는데, 앓고 있던 간 질환이 악화하여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는 태성 말고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영양 공급이 부족한 데다가 위생적인 환경이 열악하였고 예방 접종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구충약을 먹지 않아 기생충이 위로 넘어오고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겼고, 안타깝게도 아랫동네 태성이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