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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똥지게

화장실과 변소

by 화문화답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정민은 어엿한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키 성장은 다른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더뎠다. 어머니가 좀 작은 편이어서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영양 공급이 문제였다. 가공되지 않은 통보리를 솥에 넣고 쪄낸 거친 밥과 밭에서 나는 푸성귀가 주식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변을 보면 보리알이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 물론, 그 시절 그렇지 않은 집은 드물었다.


요새는 흔하디 흔하지만, 우유는 구경도 못하였고 짜장면은 중학교 졸업식 때 처음 먹어볼 수 있었다. 검붉은 소스에 덮여 커다란 그릇에 담겨있는 짜장면은 250원으로 맛보는 신세계였다.


정민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앞번호를 부여받았고 교실의 앞자리에 주로 앉게 되었다. 새 학년에 올라가면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복도에 줄 세워 놓고 키 순서로 고유 번호를 정해 주었다. 키가 클수록 뒷번호였다. 한 칸이라도 뒤로 가기 위해 억지를 부리기도 했지만, 앞줄이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뒷줄에서 딴짓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선생님과 가까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정관천(坐井觀天)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시야가 생기면서 정민에게 키가 크고 작고의 차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외형적인 면보다는 다른 차원의 고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은 그만큼 견디어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삶이 그때까지 처럼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선풍기는 아무 집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지금은 필수품이 된 에어컨도 당시는 부유층 전용이었으며, 그런 집조차 비싼 전기료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대로 틀지 못하고 살았다. 대부분은 오직 부채 하나로 또는 어둠이 몸을 가려줘야 쓸 수 있는 수돗가 오픈 샤워장에서 물을 끼얹는 방식으로 더위를 이겨야 했다. 그나마 정민의 집은 너른 대청마루가 있어 앞뒤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에 다른 집보다 여름 나기가 수월했다


겨울에는 저녁 밥할 때 아궁이에불이 덥힌 구들장의 온기로 추운 밤을 나야 했다. 그 온기가 식지 않도록 아랫목에는 커다란 꽃무늬가 있는 간색 담요가 깔렸었는데, 그게 그렇게 묵직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요 아래 몸을 묻으면 발끝을 타고 따뜻함이 퍼져 올랐다.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부딪히는 발을 밀어내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담요 아래를 벗어나면 방바닥이 얼음장같이 차가워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잘 때는 두꺼운 솜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겨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잠이 들었다. 밤새 얇은 창호지가 발린 문 틈새로 찬바람이 밀고 들어와 얼굴 위로 날아다녔다.


긴 겨울밤, 정민의 가족에게는 특별한 간식을 먹는 재미가 있었다. 소복하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가 발갛게 익은 홍시를 소반 가득 담아 오셨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그 차가운 감을 먹었다. 늦가을 서리 맞은 감을 따서 항아리에 볏짚을 깔고 켜켜이 감을 쌓은 다음, 대청마루 한쪽 그늘에 고이 모셔 둔다. 화학 약품 처리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한겨울이 되면 먹기 좋은 홍시로 변해 있었다.


배추 뿌리나 무를 깎아 먹으며 간식을 대신하던 시절, 감나무집 만의 홍시 스무디였다. 정민의 집에는 너른 마당이 있었는데, 이 마당 한쪽으로 감나무 대여섯 그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을이면 주렁주렁 열린 감들이 해마다 풍년이어서 동네 사람들은 정민의 집을 '감나무집'이라고 불렸다.




정민이 어렸을 때는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가면 요강이라고 불리는 간이 변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에 그것을 비우고 닦아야 하는 어머니는 힘드셨겠지만 정민으로서는 불편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정민이 자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요강 사용이 금지되었다.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정민도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가야 했는데 문제는 그 화장실, 변소에 있었다.


가장 불편한 점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안방을 기준으로 대문 근처에 있는 변소까지 적어도 100m는 떨어져 있었다. 특히 밤중에는 더 멀게 느껴졌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옆 변소까지 가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름에는 악취와 모기들이, 겨울에는 엉덩이가 얼어 불을 정도로 추운 날씨가 변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정민에게 변소는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후다닥 달려갔다가 오는 곳이었다.


재래식 변소의 구조는 간단했다. 큰 정화조를 땅속에 묻고 그 위에 널빤지 같은 것을 덮어 발판을 만들어 놓았다. 하수 처리되어 배출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인위적으로 퍼내야 했다. 이 일은 정민의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다. 이른 새벽이면 아버지는 똥지게를 지고 변소에 모인 인분을 밭으로 퍼 날랐다. 당시에는 밭작물에 주는 퇴비나 비료가 없었으므로 이것이 거름의 역할을 하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거의 매일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이 노랫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새마을 운동가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4월, 박정희 정부가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3대 정신을 강조하며 시작한 이른바 농촌 계몽 운동이다. 군사 독재 정권의 국가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다.


산업화로 정의되는 196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정책은 필연적으로 도시 집중화를 야기했고 이에 따른 이촌 향도 현상으로 농촌의 상황이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지고 있었다. 농촌을 살린다는 목적으로 시행된 이 새마을 운동은 농촌 경제 활성화에 어느 정도 이바지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새마을 운동가와 새싹이 그려진 녹색 깃발로 농촌 마을의 하루가 시작되었고 뭔가 활기차게 돌아가는 느낌이 있었다.


정민의 집 초가지붕도 이 무렵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시골에서는 해마다 늦가을 추수를 마치고 나면 가장 큰일이 초가지붕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낡은 지붕을 걷어내고 볏짚을 엮은 덮개인 이엉을 새로 얹어 새끼줄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 그 위에 용마루를 올려 마무리했다. 그 준비와 뒤처리까지 합치면 이삼일은 족히 걸리는 힘든 노동이었다.




아버지가 변소를 퍼내는 날, 마치 모닝콜처럼 울려 퍼지는 새마을 운동가 소리와 함께 눈을 뜨면 마당 가득 지독한 냄새가 풍겨 정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를 틀켜쥐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고 변소와 밭 사이를 오가며 정화조를 깨끗이 비워 내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똥지게는 정민의 집에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이면 다른 집의 변소를 퍼내고 계셨다. 그 대가로 얼마 되지 않는 수고비를 받았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로서는 말하자면 일종의 부업이었던 것이다. 현금을 만지기 어려웠던 형편이었으므로 아버지는 그 돈으로 자식들의 학용품 값이나 육성회비 같은 것을 충당하셨다.


변소 퍼내는 일이 끝나면 쉴 새도 없이 다시 논밭으로 나가 종일 농사일을 해야 했으니 아버지의 하루는 얼마나 길고 고되었을까. 쌀 구경은커녕 하루 끼니 때우기도 버거웠던 시절 정민의 아버지는 최소한 자식들 밥을 굶기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사셨다. 아버지의 이런 굿은 일도 마다치 않는 희생 덕분에 다섯 명의 자식들은 실제로 하루 세끼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변소를 싫어하던 정민이 도시의 수세식 화장실을 경험하고는 다시 변소가 좋아지게 된 일이 있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누나와 함께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모험을 떠났다고 해야 하나? 작은아버지는 큰 버스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꽤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서울역까지 7시간이 넘게 걸리던 완행열차를 타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다. 무더운 여름날, 통로까지 입석으로 들어찬 기차는 냉방 장치가 없어 창문을 열고 달렸다. '오라이'를 외치는 안내원이 있는 버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정민이 모르는 세상에는 개미 숫자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작은집, 기대와는 달리 정민은 도착하자마자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다. 변소, 아니 화장실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그 집은 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정민이 멋모르고 그걸 신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실내화 바닥이 물에 젖은 것이다.


이를 본 작은아버지가 이런 촌놈! 하면서 정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당혹감과 함께 까닭 모를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광경을 누나가 고스란히 목격하였고 남매는 그때부터 하루라도 빨리 촌놈이 사는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정민은 그때 처음 촌놈 집의 변소와는 다른 현대식 화장실을 구경했다.


어린 정민이 흰색 카라가 달린 남색 투피스 교복을 입은 누나의 손을 꼭 잡고 다녀온 첫 서울 구경은 작은아버지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나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집'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래, 냄새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이면 뭐 해. 아버지가 똥지게로 매번 깨끗하게 치워주시는 맘 편한 변소가 제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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