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어느 호텔의 엘리베이터. 등판에 호텔 이름이 새겨진 검정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스무 살 남짓의 직원 둘이 깔깔대고 있다.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카트에는 청소 도구며 객실 소모품, 교체용 타월 등속이 가득하다.
고객용 시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게 좀 무례하다는 생각도 잠시, 저들은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궁금해졌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저렇듯 밝은 모습이어서 한 번쯤 묻고 싶었다. 그때 마침 한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Good morning! Are you happy? (안녕! 행복하니?)"
"Yes. I'm very happy. (네, 아주 행복해요.)"
"What's happiness to you? (너한테 행복이 뭔데?)"
"For me, happiness is always, everywhere. Life is short. (나에게 행복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에요. 인생은 짧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저희 둘이 마주 보고 하이파이브까지 한다. 어린 나이에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저런 생각을 하다니. 다가가 어깨라도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대신 양손 엄지를 높게 세워 주었다. 그런데 뭐라고? 인생이 짧다고? 아이고, 그건 좀 '오 마이 갓(oh my god)'이다.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뱉어내는 몽실 구름을 쫓으며 두서없는 상념에 빠져있다가 불현듯 그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스쳤던 청춘들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참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만약 누군가 지금 내게 묻는다면, '길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온데간데없다.'라고 흔해 빠진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있다. 잡아당기면 파노라마가 펼쳐질 듯, 머릿속에 가득한 기억들 말이다. 마치 작은 통 안에 돌돌 말려있는 꽉 찬 필름 뭉치처럼.
과연 내가 찍힌 나의 필름에는 어떤 세상이 담겨 있을까? 굽이굽이 세월마다 대체 어떤 이벤트가 새겨져 있을까? 한 번쯤 꺼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론, 지난날을 돌아보며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땅을 치며 후회하거나, 무엇을 탓하자는 차원은 아니다. 단지, 추억 속의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아름답던 순간을 다시 한번 깊이 간직하고, 시린 기억이 있다면 토닥토닥 달래 주고 싶을 뿐이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잠에서 깼다. 도대체 남은 생이 얼마이기에 놈들의 구애는 이토록 처절할까. 창문을 때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그쳐있다. 여명(黎明)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 마지막 에피소드를 완성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영화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의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처럼 시간 여행을 끝내고 막 과거에서 돌아온 듯하다.
옷깃을 파고드는 늦겨울 추위와 존재감이 희미해진 잠깐의 봄을 지나, 올여름은 반복되는 폭염과 폭우, 나날이 이어지는 열대야에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평균 기온 25도의 나라로 한 두 달쯤 피신해야겠다. 그래도 이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엔데스 굿 알레스 굿(Endes gut alles gut)'은 686세대이자 마지막 베이비붐 세대인 한 평범한 남자의 지나온 삶을 그린 이야기이다. 다만,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의 재미를 위해서 사실(fact)을 기반으로 약간의 허구(fiction)를 가미했다. 그리고 집중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은 가명을 썼고,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을 막기 위하여 지명과 기업의 이름은 새로 지어서 적었다.
언감생심 '누가 내 글을 읽어주랴' 싶지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혹시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 온고지신(溫故知新)한다면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다. 혹시라도 진부한 추억 팔이, 따분한 감성 팔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그게 맞는 지적임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냥 조용히 덮어주면 고맙겠다.
모두에게 그렇듯이 가버린 세월은 허무하다. 그래서 마지막 임팩트가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제목을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endes gut alles gut)’로 정한 이유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해피엔딩으로 향하자는 의미이다. 전에는 미처 몰랐던, 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누리며 살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제 언제든지 페이지를 넘기면 추억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다. 높게 일렁이던 파도가 윤슬이 되어 반짝거리는 느낌이다.
언제나 내 편인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돼주었던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모두 그들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