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선물은 텃세입니다만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

by 화문화답

우리는 종종 아름다운 결말, 노력에 대한 정직한 보상 같은 이상적인 기대를 하면서 산다. 하지만 막상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면 예상치 못한 변수에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불합리한 결과에 직면한다.


다만, 이러한 괴리가 불가역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고,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얻기도 한다. 확고한 목표를 향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나아간다면 더욱 단단해질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정민은 대리 2년 차에 ○○점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관례로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아마도 홍 차장이 신경을 써주었을 것이다. 인사부의 인사명령 전반에 관해 기획실이 사전 협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그것도 상전(桑田)에서 벽해(碧海)로. 정민은 회사의 캐시카우인 백화점 부문에서 관리자로 일하면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


게다가 기획실을 떠나는 날, 홍 차장이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라고 했다.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볼 때 의례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악에는 돌아갈 곳까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바다는 뽕밭과 생태계 자체가 달랐다. 낯선 환경, 전혀 다른 업무, 협력사와의 이해관계, '고객은 왕이다'로 시작하는 고객 중심의 사고 같은 것들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 정민이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동료의 텃세였다. 적은 항상 내부에 있는 법이다.




백화점 영업부서의 일반적인 조직 체계는 팀 아래 여러 개의 파트가 있고, 파트는 품목을 중심으로 PC(profit center)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성의류팀 아래 여성캐주얼파트, 여성정장파트, 디자이너파트 등이 있고 여성캐주얼파트는 영캐주얼 PC, 컨템퍼러리 PC, 베이직캐주얼 PC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팀장은 부장급, 파트장은 과장급, 정민처럼 대리급이 PC장을 맡았다.


정민의 위로는 계열사인 ○○건설 출신 이 부장과 중소 쇼핑몰에서 경력자로 넘어온 김 과장이, 아래로는 나이가 정민보다 한 살 많은 5급 사원과 수불 및 서무를 담당하는 6급 여직원이 있었다.


김 과장은 한쪽 다리를 살짝 절며 걸었다. 눈빛이 형형했고 얼굴에는 항상 기름기가 번들번들했다. 말하는 중간에 한 템포씩 여백을 두는 습관이 있었으며 다소 거만한 인상을 풍겼다.


5급 사원인 허정 담당은 머리가 반쯤 벗어진 얼굴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사람이 좋아 보였다. 사실 전반적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시간이 해결해 주는, 한 줌도 되지 않는 '노하우'를 쥐고서 상대를 통제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당시 회사의 인적 구성은 동종업계의 그것에 비해 특이한 구조였다. 정민처럼 그룹 공채로 입사한 경우와 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전출되어 온 경우 외에도, 자사 고졸 채용으로 입사한 직원들 수가 적지 않았다.


그룹이나 회사의 경영자들은 백화점을 첨단 패션 메커나 전문화된 유통 채널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단순히 '물건 파는' 슈퍼마켓, 잡화점, 의류 상가의 총체 정도로 인식했다. 따라서 백화점 비즈니스의 전문성보다 단순한 매장 관리 정도의 업무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백화점은 연간 프로모션 계획을 기본으로 매주 전개할 테마가 미리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대축제'나 '설명절 선물상품 특집', '정기 바겐세일'처럼 계절이나 이슈에 맞춰 판매 촉진을 위한 큰 흐름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각 영업 부서는 그 주제에 맞춰 신상품, 할인 상품, 기획 상품과 로스 리더(loss leader) 상품 같은 특가 상품 그리고 임시 또는 특설 행사 매장에 전개할 행사 상품의 종류와 품목, 수량과 가격을 정하고 광고, 홍보에 반영되도록 이를 '광고판촉계획서'에 요약 정리하여 광고판촉팀에 제출한다.


광고판촉팀은 이를 근거로 소구력이 강한 품목별 아이템과 이벤트나 사은품 증정 같은 프로모션을 엮어 매체 광고, 현수막과 전단, VMD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제안하고 내점 유도 및 판매로 연결한다.


광고에 나가기 전 오류를 수정할 기회가 두 번 주어지는데 만약 이때 걸러내지 못하면 큰 낭패를 본다. 일단 광고에 나간 내용은 영업 부서에서 종국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만큼 '광고판촉계획서'는 영업의 시작점이자 고객과의 약속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훗날 정민이 ○○점에 근무할 때, 담당 직원의 부주의로 '49,000원 균일가'가 '4,900원 균일가'로 광고에 잘못 나간 적이 있었다. 이 광고를 보고 오픈 전부터 고객이 몰려들어 200m가 넘는 줄을 섰다.


이때부터는 아무리 해명하고 이해를 구해도 소용없다. 그럴수록 오히려 고객 컴플레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문제를 키울 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맞다. 광고에 나간 그대로 판매해야 한다. 그게 상책이다.


비단 이 건 뿐만은 아니다. 아무리 주의 깊게 본다고 해도 사람인지라 이런 일이 가끔 생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직원이 개인적으로 책임지기에는 너무 크다. 그렇다고 백화점 측에서 처리해 줄 리 만무하다. 대부분은 백화점 직원의 '간곡한 요청'에 협력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기대하며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쨌든 이런 일이 한 번 생기면 여러 사람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정민이 ○○점 ○○팀에 출근을 시작하고 딱 삼 일째 되는 날, 문제의 '광고판촉계획서'를 받았다. 아니, 받았다라기보다는 그냥 어느 순간 정민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제목에 광고판촉계획서라고 크게 적혀있고 나머지 앞면과 뒷면은 백지상태인 A3 크기의 서식이었다.


정민은 당연히 이런 업무를 알 리가 없었다. 인수인계는 고사하고 양식을 구경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민에게 달랑 종이 한 장을 던져 주었을 뿐, 그에 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정민의 반응이 없자 허 담당이 쓱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이거 늦으면 큰일 나요! 본인이 급해진 거다. 언제나 급하면 진다. 정민도 평소 급한 성격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닌 듯하다.


그나저나 뭘 '알아야 면장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닌가. 텅 빈 백지를 망연자실 들여다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그러다 문득 느낌이 왔다. 아! 이게 바로 환영 선물(?)이구나. 그렇다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다. 정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했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허 담당은 '너의 일이니 나에게 묻지 마라'는 묵언의 암시를 주고 이미 쌩하고 달아나 버린 뒤였다. 어차피 그쪽보다는 상급자인 과장을 선택하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


"그런 것까지 과장한테 물어?"


돌아온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그럼 과장한테는 어떤 걸 물어야 하지? 이 사람들 재미있네? 그들은 역시 정민의 추측대로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치졸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대리 2년 차에 느닷없이 기획실에서 넘어온 정민을 경계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어쨌든 정민의 업무라니 하기는 해야 한다. 다른 영업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도, 옆자리의 다른 PC장도 정민의 질문에 '그냥 대충 하면 된다'며 건성으로 대답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들도 자기 일에 바쁘니까. 어쩌면 오히려 그런 것도 모르는 정민이 답답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정민은 현재 직면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놓고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드디어 답을 찾았다. '이쪽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고객의 입장'에서. 답은 바로 거기 있었다. 정민은 '내가 고객이라면 어떤 상품을 보고 싶고, 어떤 상품을 사고 싶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먼저 전년 같은 기간과 최근 광고판촉계획서를 가져다 훑어보았다. 전임 PC장이 공석이었으므로 허 담당과 김 과장이 작성한 것들이다. 전관 광고판촉 계획과 주간 단위 테마에 맞춰 흐름을 파악해 보니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혔다.


이번에는 매장의 각 브랜드 매니저들을 만났다. 모든 문제와 답은 현장에 있는 법이다. 그들은 경쟁 브랜드 보다 광고 한 줄이라도 더 나가야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지금 정민을 골탕 먹이려는 사람들과 달리 정민에게 우호적이었다.


매니저들과 대화하면서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킬링 포인트가 무엇인지 찾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협력사 영업 담당자들에게 물량 지원을 요청했다. 퇴근해서는 종로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달려가 머천다이징과 광고판촉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급한 대로 토막 지식을 쌓았다.



김 과장이 광고판촉계획서를 쓱 살펴보더니 뚱한 표정으로 결재란에 사인을 휘갈겼다. 평소 무게를 잡으며 잔소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의미이겠지. 아무튼 일단 통과다. 곧바로 부장실로 향했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부장은 엄격하지만 비교적 영업적인 마인드가 있는 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분은 정민이 처음으로 작성한 광고판촉계획서를 보고 뭐라고 할까. 가슴이 콩닥거렸다. 에이, 모르겠다. 아니라면 새로 하면 되지 뭐. 그러다 급하면 자기들이 하겠지.


"박대리, 제법인데. 잘했어."


정민은 깜짝 놀랐다. 팔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 예상 밖의 칭찬은 진심일까? 불현듯 의심이 생겼다. 혹시 이 분도 한패가 아닐까?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부장님, 제가 처음 하는 거라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서툴러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참신하고 좋아. 역시 기획실 출신이라 상품 기획도 잘하는구먼."


부장은 결재란에 사인한 광고판촉계획서를 건네주며 정민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왠지 지난 며칠 정민의 마음고생을 짐작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정민은 팀 업무는 물론 영업 부문 직무에 관한 것들을 주로 이 부장에게 배웠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이 부장은 정민에게 아이디어를 묻기도 하고, 회의 시간에는 정민의 의견을 비중 있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급하면 정민을 찾았다.


정민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큰 행운을 두 번 연속해서 맞이하게 되었다. 기획실에 홍 차장이 있었다면 영업팀에는 이 부장이 있었다. 덕분에 이후에도 간간이 이어지는 속 좁은 인간들의 텃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팀 매출 목표 달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은 물론, 서비스 평가에서도 매번 좋은 결과를 받았다. 나아가 담당 PC의 시장 점유율과 고객 충성도 지표가 경쟁사인 A백화점과 B백화점의 해당 PC를 넘어섰다.




직장생활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나가는 삶의 터전이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구성원 상호 간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배가시키는 과정에서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 준다. 때로는 힘든 시간을 위로와 격려로 극복하며 새로운 도전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성공적인 직장생활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아랫사람이나 동료가 협업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중요하다면 윗사람과 관계는 성장의 발판, 성공의 후원자라는 측면에서 좀 더 크리티컬한 면이 강하다.


정민에게 홍 차장이나 이 부장은 바로 그러한 기회의 제공자로서 윗사람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본질이 그러하듯 매번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는 이상한 놈, 나쁜 놈이 더 많았다. 무능력하거나, 독선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불통이거나, 어디를 가나 그런 사람이 꼭 한둘은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정민의 발목을 잡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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