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한 때 무협지에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간교하고 포악한 사파(邪派)의 무리가 난무하는 세상에, 무공을 전수받은 정파(正派)의 수제자가 나타나 악을 평정하고 의리를 실현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대부분 뻔한 스토리로 전개되지만, 현실 세계는 무림(武林)이라는 점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정민은 점차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백화점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백화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덩달아 어두운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 근무하던 기획실이 온실 같았다면 어쩌면 이곳은 진정 무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백화점이 앞다투어 내세우는 '수입 명품, 고품격, 차별화된 서비스'같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의 이면에는 분명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은 법이다. 어둠을 틈타 곳곳에 출현하는 무림 고수들은 하나같이 무서운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노동조합에서 연락이 왔다. 노조 가입 권유였다. 기획실에 근무할 당시에는 노조 가입이 일종의 암묵적 금기 사항이었지만 소속이 영업부 대리인 현재는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 노조 가입은 대리 직급까지만 가능하였다. 정민은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입신청서를 냈다.
노동 운동이나 노조에 관한 관심보다는 혼자 튀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노조회비는 급여에서 원천징수 된다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 노조 지도부는 열악한 직원 복지와 처우를 개선할 의지가 없다는 노조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회사 측과 특별한 이슈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참고로 이 노조는 훗날 회사가 동종업계에서 나 홀로 정리 해고의 칼춤을 추고 있을 때조차 침묵으로 일관할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본능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런 성향에 비추어 볼 때 느닷없는 그 변신이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다.
그 해 임금협상이 최종 결렬되어 파업이 결의되었고, 노조 측은 매장을 점거하여 농성에 돌입하였다. 정민의 기억에 의하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수많은 노조원이 고객 동선에 연좌하여 북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쳤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조 간부를 따라 구호를 외치는 노조원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백화점 매장 한복판에서, 그것도 영업시간 중에 점거 농성이라니. 그렇다고 회사 측에서는 영업을 중단하고 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고객과의 신뢰를 지킨다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하루 영업 손실이 어마 무시하기 때문이다.
비노조원인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이 동원되어 고객 동선을 확보하고 고객들을 안내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으나 혼란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고객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렸고 당황한 판매 사원들은 어쩔 줄 몰랐다. 사실상 영업 중단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핸드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사무실에 몰려 들어와 직원들에게 파업에 동참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정민을 비롯한 대리급 이하 노조원들은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곳은 자신들이 현재 근무하는 매장 아닌가.
이런 상황에 이르자 윗분들은 직원들이 외부로 피신하도록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영업시간이 지나고 농성이 해산되면 다시 불러 모아 파업에 동조하지 말 것과 영업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압박이 지속하면서 몇몇은 파업 동참으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정민은 끝까지 남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은 후유증은 파업 종료 이후까지 이어졌다.
결국 정민은 눈치를 보다 못해 노조 탈퇴를 신청했다. 회사 노조가 유니언 샵(union shop)이나 클로즈드 샵(closed shop)이 아닌 노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오픈 샵(open shop) 형태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탈퇴 처리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동안 노조 회비가 꼬박꼬박 공제되다가 신청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비노조원이 되었다. 이런 노동조합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은 정민이 처음 겪어보는 무시무시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정민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구내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신기하게도 이 전화의 벨 소리에는 생물처럼 감정이 담겨있다. 이번에도 느낌이 온다.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장으로 달려나가 보니 ○○○ 브랜드 판매 직원이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가린 채 울고 있다. 그 앞에는 중년의 남자 고객이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는 울고 있는 직원을 향해 삿대질해 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야, 나를 뭐로 보고 그딴 걸 하라는 거야!"
직원은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당하고 있는 걸까. 필시 '고객은 왕이다'라는 교조(敎條)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리라. 책임자 찾는 고객에게 불려 나가 명찰을 쥐어뜯기거나 핸드백으로 어깨를 맞을 때마다 치밀어 오르던 감정이 동병상련처럼 불쑥 솟았다.
정민을 본 직원은 그때야 긴장이 풀린 듯 푹 주저앉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119를 부르고, 구급대가 들이닥치고,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병원으로 내달리는 사이 그 고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은 수표였다. 수표 뒷면에 이서를 해달라는 직원의 요청에 '자존심이 상한' 고객이 흥분하여 벌인 일이었다. 당시 매뉴얼에 의하면 고객이 수표를 제시할 경우 판매 직원은 수표의 진위 또는 유효 여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수표 뒷면에 이서를 받은 다음, 고객의 신분증과 대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판매 직원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나를 뭐로 보고 이러는 거냐'는 고객의 고함은 정민에게도 귀에 익은 소리였다. 얼마 전 개점 기념행사 기간 중이었다. 사은품인 차렵이불 재고가 없어 대신 교환권을 증정한 적이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고객이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 매장은 수입 명품인 G브랜드였고, 그 고객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이었다. 매장 내에서 담배까지 피우며 직원들에게 호통치는 모습은 평소 TV에서 보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백화점에서 고객은 필시 무림의 최강자였다.
백조가 호수 위에 우아하게 떠 있으려면 수면 아래 두 발을 쉴 새 없이 저어야 한다. 영업 중에 보이는 백화점이 물 위 백조의 모습이라면, 영업이 끝나고 또는 휴점일의 백화점은 보이지 않는 내면이다.
그 시간 동안 매출 마감, 청소, 재고 조사, 상품 진열, VMD 교체, 매장 공사 등 일련의 다음 영업 준비가 이루어진다. 특히, 주간 단위로 바뀌는 행사 매장은 기존 상품과 매대가 빠지고 새로운 상품이 들어오면서 사람, 상품, 집기와 진열대, 각종 POP와 쇼카드, 먼지, 쓰레기로 뒤섞여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한정된 시간 안에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 고객에게 보여야 하므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백화점 담당자로서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일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 않으면 이 과정에서 거친 언행들이 난무한다.
심한 경우 욕설을 하거나 매대를 발로 차는 폭력을 행사하는 담당도 있다. 그 대상은 주로 판촉 사원이다. 짧은 시간, 좁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대환장의 시간을 목격한 정민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은 백화점 소속인 직영 사원과 입점 매장의 판매 촉진을 위해 협력사에서 파견 나온 판매 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 직원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대부분 젊은 여성이고 우수한 직원들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근무 환경이나 연봉 수준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 전문 인력이고 함부로 취급받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폭언이나 거친 행동을 하던 백화점 담당에게 당시 상황을 들어보면 그들도 할 말이 많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어쨌든 백화점 담당자 역시 무림 고수임에 틀림이 없다.
백화점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생활하다 보니 서로 부딪히거나 눈에 띄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것도 남들 노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더 바쁜 매장의 속성 때문에 마치 외딴섬 안에 함께 갇혀 사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만큼 심리적인 동질감이 크다.
'남녀상렬지사'라고 해야 하나? 필연적으로 청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하루가 멀다고 발생한다. 이를테면, 갓 들어온 ○○브랜드 막내가 갑자기 출근하지 않는다면, 남자 직원이 근무하는 인근 매장에 또 다른 무단 결근자가 있는지 알아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동해안의 어느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 밝혀진다. 이런 '눈 맞음'을, 정확히 말하면 급작스러운 무단결근 사태를 방지하고 후속 처리를 하는 일은 뭐랄까, 항상 찜찜한 뒷맛을 남긴다. 사생활이라는 측면과 직장인으로서 의무 사이의 모호함 때문일 것이다.
백화점이라는 곳은 사람이 많다 보니 말이 많고 소문의 빠르기 또한 가히 광속 급이다. 어떤 이슈이든 순식간에 전 층에 말이 퍼진다. 특히, 그 소문이 말초적인 '카더라' 통신일 경우 더욱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 루머의 당사자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면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벗어날 수 있다. 당시에는 주로 화장실 문짝이 지금의 SNS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회식 자리에서 1차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게 되면 사람들은 보통 두세 명씩 대화를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한다. 그 모습의 앞뒤 부분을 편집하고 보면 둘이 나란히 걷는 특정 남녀가 클로즈업된다. '○○○와 ○○○가 사귄다'로 출발한 소문은 삽시간에 '둘이 모텔에 들어가더라'로 확대 재생산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동기 부여와 사기 진작의 주요 수단으로 회식을 강조하는 기업 문화라면, 원하든 원치 않든 백화점 관리자는 판매 직원들과 자주 회식을 해야 했다. 문제는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한 번에 모일 수는 없고 브랜드별로 나누어서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번 회식을 시작하면 며칠을 계속해야 한다. 어디는 하고, 어디는 안 하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서 일부 짓궂은 여직원은 어느 틈인가 옷에 일부러 립스틱이나 반짝이(펄) 같은 화장품 자국을 묻혀 놓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게다가 폐점하고 뒷정리를 마치면 8시, 회식 장소로 이동해서 자리에 앉으며 9시,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12시가 훌쩍 넘는다. 그러니 아무리 이해심이 많다 하더라도 그 꼴을 보는 아내가 좋아할 리가 없다.
신사 정장이나 구두처럼 남자 직원들이 많은 브랜드와 회식이 있는 날에는 술을 몇 배는 마셔야 한다. 남자들은 오고 가는 술잔을 의리 또는 신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시험이나 승부처럼 여길 때도 있다. 이에 지지 않으려면 많이 마실 수밖에 없다. 만약 이 기싸움에서 지면 앞으로 그 남자 직원들을 통솔하기 어려워진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매장에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어떤 때는 이 판매 직원들이 특히, 여직원들이 문득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진짜 숨은 고수는 이들이 아닐까?
정민이 근무하는 ○○백화점 ○○점은 부자 동네로 유명한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그 지역 특성이나 고객들의 니즈에 맞게 하이엔드의 해외 명품이나 고가의 글로벌 브랜드, 유명 내셔널 브랜드 위주로 매장을 끝없이 재편하여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S/S, F/W MD 개편 시기의 휴점일에는 여지없이 매장 인테리어 공사가 펼쳐진다. 물론 그 모든 작업은 다음 날 매장 오픈 시간 이전에 완벽하게 세팅되어야 한다. 사정변경원칙이니, 부득이한 사정이니 이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방심하거나 잘될 거라는 막연한 신뢰감을 갖는 순간 여지없이 일이 터지기 때문에, 관리자나 책임자는 인부들과 같이 밤샘 근무를 해야 한다.
그날도 오픈 시간을 얼마 앞두고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매장 이곳저곳은 공사 부자재들로 엉망이었다. 초조해진 정민은 현장 작업 책임자에게 서둘러 줄 것을 거듭 재촉했다. 그러다가 서로 예민해져서 입씨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분이 갑자기 인부들을 데리고 매장을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상황 파악을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바닥의 진짜 갑(甲)이 누군지 바로 판가름이 났다. 바로 그게 정민의 최대 약점이었으며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었다. 급히 뒤쫓아간 정민은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반복해서 사과했다.
마지못해 현장에 복귀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스피드대로 마감 공사를 진행했다. 정민은 그저 제시간에 끝나기만을 빌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바로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그들이 권력자였다.
평화롭기 그지없고 온갖 고급스러움과 고품격이 존재하는 화려함의 끝판 왕, 백화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 역시 다른 세상처럼 어쩌면 무림인지도 모른다. 강호 무림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정민은 혹시라도 무시무시한 고수들의 무공에 상처를 입거나 한칼에 목숨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내공을 키워야 했다. 정파의 수제자가 신공을 연마하듯. 무엇보다 그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항상 조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뭐, 꼭 ○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은 아니니까.